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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열병 앓은 19살 쇼팽, 그걸 몰랐던 비련의 여인
 
오준   기사입력  2019/01/18 [12:06]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7)

중앙일보

콘스탄챠 그와드코프스카. 폴란드 국립 쇼팽 협회 소장. 쇼팽이 피아노 외에 좋아한 음악 분야는 성악이었다. 청년 쇼팽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도 소프라노 가수였다.

 



프레데릭 쇼팽과 피아노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사이다. 그의 곡에는 모두 독주 혹은 협주의 형태로 피아노가 들어간다. 피아노 외에 그가 좋아한 음악 분야는 성악이었다. 쇼팽과 친분을 쌓은 여가수는 여럿 있었다. 막 학교를 마치고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려는 청년 쇼팽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도 소프라노 가수였다.

음악원을 졸업할 무렵 쇼팽은 진로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엘스너에게 본격적으로 작곡을 배우며 쇼팽의 음악 세계는 더 단단해졌다. 시간과 함께 음악적 경험도 풍부해졌다. 선진도시 베를린으로 가서 오페라도 보았고 악마적 기교를 자랑하며 유럽을 떠들썩하게 했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에 매료되기도 했다. 이미 다양한 장르의 여러 곡도 썼다.

성숙해진 그는 더 새롭고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했다. 아버지 미코와이는 아들의 재능에도 불구하고 미래가 불투명한 음악가를 아들의 앞길로 결정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었다. 그러나 운명은 지어져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면 궤도는 끊어진다. 이제 스스로 길을 찾아가야 한다. 바르샤바는 그를 품기에 좁았다. 어디서 어떻게 공부를 이어가야 하나. 그의 고민은 깊어갔다.

19세 쇼팽 앞에 나타난 미녀 가수

진로 문제로 고민이 많은 19세의 쇼팽 앞에 같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미녀 가수가 나타났다. 동갑내기로 짙은 머리에 감성의 표현력이 풍부하고 높은음을 내는 콘스탄챠 그와드코프스카였다.

성악 담당 교수의 지도아래 학생들이 교내 연주회를 열었는데 쇼팽은 그 연주회에서 콘스탄챠를 처음 보았고 단번에 반했다. 다른 여성 가수도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온통 콘스탄챠에게만 향했다. 쇼팽은 그녀에게서 이상형을 발견했다. 진로에 대한 복잡한 생각은 그녀에게 향하는 그의 마음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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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의 쇼팽의 풋풋한 모습. 암브로지 미에로세프스키 그림(2차 대전 중 유실). [출처 위키미디어]

 



당시 쇼팽이 절친 티투스 보이체호프스키에게 보낸 편지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그녀가 언급되었다. 그는 그녀를 처음 본 후 6개월 동안 매일 밤 꿈속에 그녀를 보았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숫기 없는 그는 말 한번 붙여볼 용기를 갖지 못했다. 대신 곁으로 다가가는 젊은 남자들에게 미소를 흘리는 그녀를 보면 괜히 심술만 낼 뿐이었다.

콘스탄챠는 파에르의 오페라 아그네스에서 주인공 역으로 데뷔무대를 가졌다. 그녀는 무대에서 더욱 빛났다. 비극적인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했고 고음처리도 완벽했다. 모든 관객이 그녀의 공연에 빠져들었고 오페라가 끝났을 때 끝없는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그녀의 가수로서의 길은 탄탄한 듯했다. 쇼팽의 그녀를 향한 마음은 더 강해졌다.

어느 날 성당에서 그녀를 보고 슬프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 감정에 빠졌다. 홀린 듯 정신이 멍한 상태로 거리로 나갔다가 달려오는 마차에 치일 뻔했다. 잠시 후 그는 정신을 차렸고 미친 것 같은 자신의 모습에 놀랐다.

말로 풀지 못한 자신의 속마음을 그는 음악으로 풀었다. 당시에 쓰인 쇼팽의 모든 작품에는 그녀에 대한 그의 감정이 실려 있다. 그러나 그의 두 번째 피아노 협주곡 e 단조만큼 그녀에 대한 마음을 강렬하게 표현한 것은 없었다. 쇼팽은 바르샤바를 떠나는 고별 무대에서 이 곡을 연주할 계획이었는데 느린 2악장에서 그녀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표현했다.

그는 친구 티투스에게 이 악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강하게 연주를 할 필요는 없어. 이것은 수천 가지 행복한 기억들을 조용히 되돌아보는 느낌을 주는 사랑의 감정, 조용한 슬픔이야. 아름다운 봄날 저녁, 달빛 아래에서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해.”

1830년 8월 곡은 완성되었고 그가 외국으로 나가기 전의 고별 연주회는 10월에 여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쇼팽은 용기를 내서 콘스탄챠를 자신의 고별무대에 설 수 있도록 해달라고 담당 교수에게 요청했다. 콘스탄챠가 공연에 참여하려면 담당 교수뿐만 아니라 교육 관할 장관의 허가가 필요했다. 왕궁 관리인의 딸인 그녀가 국비로 교육을 받고 있었다는 이유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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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 e단조 자필 악보. 폴란드 국립 쇼팽 협회 소장.



쇼팽의 고별 연주회는 대성공이었다. 우선 폴란드가 낳은 천재가 더 큰 미래를 위해 폴란드를 떠난다는 것을 관객들은 알고 있었다. 그 연주회 이후 그의 공연은 또 언제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의 곡도 좋았고, 그가 연주한 피아노와 관현악단의 조화도 완벽했다. 마지막으로 연주한 폴란드 전통 춤곡인 마주르카 풍의 환상곡도 청중들의 애국적인 마음을 자극했다. 공연이 끝나고 쇼팽은 4번이나 불려 나와 박수에 답례해야 했다.

쇼팽에게는 무엇보다 콘스탄챠의 무대가 있어서 더 인상적이었다. 콘스탄챠는 공연의 2부에서 로시니의 오페라에 나오는 곡을 하나 불렀는데 하얗게 빛나는 옷을 입고 머리에는 장미꽃을 꽂고 무대에 섰다. 무대 위의 그녀 모습에 쇼팽은 매료되었다.

연주회의 성공에 대한 기쁨, 집을 떠나야 한다는 무거운 감정, 콘스탄챠에 대한 애틋함이 뒤섞였다. 연주회가 끝나고 어디서 용기가 솟았는지 그는 콘스탄챠를 만나 반지를 선물했다. 콘스탄챠는 리본을 답례로 건넸다.

쇼팽이 바르샤바를 떠나기에 앞서 친구들은 그의 미래를 축원하는 글을 그의 앨범에 남겼다. 그 글 중에는 콘스탄챠가 남긴 2개의 4행시도 있었다. 폴란드어 원본을 보면 그 두 시는 모두 1행과 3행 그리고 2행과 4행에 각운이 완벽하게 맞았다. 필자가 영어로 번역된 것을 기초로 다시 우리말로 옮겨 본 그 2개의 시는 다음과 같다.

싫어도 운명을 맞이하세요

당신은 그래야만 하는 것을.

잊지 말고 기억하세요

여기 폴란드에 당신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영예의 월계관이 시들지 않게 하려면

당신은 가까운 친구와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야 해요

이방인들이 당신을 더 칭송하고 더 극진히 대할지라도

우리만큼 당신을 사랑하지는 못해요.

일주일 후 쇼팽은 그의 가족과 선생, 친구들의 떠들썩한 환송 속에 바르샤바를 떠나 빈으로 향했다. 그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르샤바에서는 러시아의 압제에 항거하는 대규모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수개월에 걸친 그 봉기를 러시아는 힘으로 제압하였다. 많은 폴란드인이 희생되었다.

외국에서 이 소식을 들은 쇼팽은 크게 동요하였다. 조국의 앞날에 대해 걱정했을 뿐 아니라 가족과 콘스탄챠를 염려하며 괴로워했다. 쇼팽은 후에 파리에 도착해서도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했다. 둘 사이에는 한동안 서신 왕래도 있었다.

부유한 귀족과 결혼한 쇼팽의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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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와지앤키공원에 세워진 쇼팽의 동상. 쇼팽의 짝사랑은 가족도 모르는 일이었다. 쇼팽은 바르샤바에서도 콘스탄챠에게 빠졌다가 곧바로 눈앞의 현실로 돌아와서 진로문제로 고민했던 사람이었다.



콘스탄챠는 졸업 후 가수로서의 음악경력을 계속 이어가 수차례 오페라 무대에 올랐다. 그녀의 공연 수익금은 폴란드 독립을 위해 싸우는 봉기 군을 후원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쇼팽이 자신을 사랑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콘스탄챠는 쇼팽이 바르샤바를 떠나고 1년 3개월이 지났을 때 부유한 귀족의 아내가 되었다. 결혼과 함께 음악계를 떠나면서 그녀의 가수로서의 화려했으나 짧은 경력은 끝났다.

쇼팽의 짝사랑은 가족도 모르는 일이었다. 쇼팽이 파리에 완전히 정착하고, 마리아 보진스카를 만나서 약혼과 파혼을 겪고, 조르주 상드를 만나 동거하는 중, 콘스탄챠는 잊혔다. 바르샤바에서도 한순간 콘스탄챠에게 빠졌다가는 곧바로 눈앞의 현실로 돌아와서 진로 문제로 고민했던 그였다.

파리에서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살아난 때는 불확실한 앞날 때문에 고민할 때였다. 그 상황이 해결되었을 때 그녀에 대한 열정은 온도를 잃었다. 어떤 때는 그녀에 대한 사랑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도 했었다. 상황은 때로 작은 감정을 크게 키운다. 어쩌면 쇼팽의 콘스탄챠에 대한 사랑은 앞날에 대한 어지러운 생각으로부터의 도피처였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언제인지는 모르나 나중에 쇼팽은 콘스탄챠가 쓴 시의 마지막 구절에 ‘그들도 사랑해 줘요’라고 써넣었다.

콘스탄챠는 35세의 젊은 나이에 시력을 잃고 장님이 되었는데 쇼팽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전기가 출간되었을 때 친구가 읽어주는 그 전기를 듣고서야 젊은 시절에 쇼팽이 자신을 짝사랑했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그녀는 그것을 듣고도 자신의 결혼생활에 만족한다고 말하면서 아무런 회한을 드러내지 않았다.

쇼팽 사후에 짝사랑 사실 알아

그러나 젊은 시절 그녀가 쇼팽에게 애정을 품은 것을 안 그녀의 가족은 쇼팽이 세계적으로 크게 될 인물임을 알고서 그의 위상이 주는 부담에 눌려 그녀가 사랑을 키워가는 것을 막았다는 얘기도 있다. 그녀는 쇼팽에게 받은 반지를 고이 간직했다가 손녀에게 물려주었다. 쇼팽보다 40년을 더 살았던 그녀는 쇼팽과 주고받은 편지와 쇼팽의 초상화도 소중히 보관하다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야 불태웠다.

이쯤 되면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애정이 어느 쪽이 더 진정성을 가졌는지 궁금해진다. 아무튼 그때 20세의 쇼팽이 남긴 작품은 진실한 모습으로 남아서 오늘날까지 듣는 이의 마음에 진정한 감흥을 안긴다. 피아노 협주곡 1번 e 단조의 2악장은 쇼팽의 곡 중에서도 특히 아름다운데, 피아노 독주가 아니라 관현악단과 협주하는 곡이어서 더 특별하다.

다음 편은 조국 폴란드를 떠나는 쇼팽과 그를 보내는 친구들의 특별한 방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연합신보 사회부 국장으로 다소 활용과
파이낸셜신문 - e중앙뉴스 논설위원으로 많은 작품 기고 하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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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1/18 [12:06]  최종편집: ⓒ 정책평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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