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항일학생만세운동 기념식열려

정철호 | 기사입력 2019/03/05 [16:46]

3.5항일학생만세운동 기념식열려

정철호 | 입력 : 2019/03/05 [16:46]

 
오늘의 서울역인 남대문역 의미도 되찾고자, 3.1운동 서울의 상징사건으로 새로 발굴하여 14시 서울역광장에서 사회적협동조합연합회중앙회, 대한민국문화체육관광예술환경 총연합회,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100주년기념 범국민 추진위원회가 주최하고, 3.5남북학생만세운동 선양회, 우리민족항일만세운동 선양회, 세계한인재단, 한국한상인 연합회 주관, 사단법인 서울특별시 중구 의정회의 후원으로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모여 기념식을 개최하였다.
 

▲     © 정철호



3·5항일학생만세운동은 1919년 연희전문학교(연세대 전신) 김원벽과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고려대학교 전신) 강기덕, 경성의학전문학교의 한위건(韓偉建) 등 3월 1일 탑동(탑골)공원에서 신망 높던 학생 중심의 2차 확산 의거였는바, 이화학당 유관순열사도 참여하였다고 기록됩니다.

 

1919년 3월 7일부터 보도되어, 시위 때 검거된 학생 210명에게 내려진 법원 판결문인 ‘경성지방법원 예심종결 결정서’에 따르면 학생들은 3월 1일과 5일 두 차례 시위를 벌였다고 합니다.

덕수궁의 ‘이태왕’(고종) 국장은 3월 3일 거행하여, 3월 1일 대여 운구 예행연습으로 많은 사람이 대한문 앞에 모였고, 3월 5일의 시위는 3일의 국장에 이어 반혼제 즉 삼우제 날로 상주인 ‘이왕’(순종)이 홍릉에 가서 혼백을 모셔오는 날이었습니다.

 

3월 5일 아침 8시부터 남대문역(현 서울역)과 덕수궁 대한문 사이 일대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9시부터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고 한다.

5일 아침 연희전문의 김원벽, 보성전문의 강기덕은 인력거를 타고 달리면서 ‘삐라’(전단)를 뿌렸습니다. 1차 시위 때와는 달리 수많은 깃발이 등장하고, 붉은색 포(赤布)를 나누어 팔뚝에 두르고 기세를 돋았습니다. ‘조선독립신문’ ‘각성호회보’ 등 전단 신문들이 뿌려졌고, 시위는 밤늦도록 진행되어 일부는 동대문 쪽으로 가서 금곡 홍릉에서 돌아오는 황제(순종)를 맞이하였다고 한다. 

 

학생과 군중들은 남대문의 저지선을 뚫고 두 갈래로 나뉘어 시가행진을 감행, 한 갈래는 남대문→조선은행 앞을 거쳐 종로 보신각에 집결하였고, 또 한 갈래는 남대문→태평로→대한문앞-무교동을 거쳐 종로보신각에서 합류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였으나, 일경의 탄압으로 보신각 앞에서 시위대는 해산 당하고 말았었습니다.

 

경성의전, 경성공전, 경성전수(법전), 경성고등보통학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등 관립학교 학생 대표들이 앞장서고 연희전문, 보성법률상업전문 및 사립 중등학교 대표들이 합세하였습니다. 고종의 장례식을 참관하고 지방으로 돌아가는 참배객들에게 운동의 지속성을 전파하여 3월 중순 이후 각 지방으로 시위운동이 확산되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고 한다.

<한상석 사회적협동조합연합회중앙회회장글 인용>

공의공도 정의와 평화세상을 위하여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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