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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도 프랑스도 아닌, 알자스 와인이다
 
이은경   기사입력  2019/10/09 [08:47]

  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매주 수요일 <한국일보>에 찾아 옵니다. 2018년 한국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부문 우승자인 시대의창 출판사 김성실 대표가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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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트 병에 담긴 다양한 알자스 와인. 왼쪽부터 늦게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인 방당주 타르디브, 귀부포도를 손수확해 만든 와인인 셀렉시옹 드 그랑노블. 귀족 포도 품종을 50% 이상 블렌딩한 와인인 정티, 전통 방식 스파클링 와인 크레망달자스와 알자스식 와인잔. 각 와이너리 홈페이지에서 캡처

 


노벨상의 계절이다. 1952년 노벨평화상은 독일계 프랑스인 의사 슈바이처가 받았다. 그는 자신을 두고 서로 자국민이라고 싸우는 프랑스와 독일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프랑스도 독일도 아닌 알자스 사람이다.” 그가 이렇게 말한 배경에는 알자스의 아픈 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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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슈바이처(1875~1965). 위키미디어 제공

 


알자스는 로마제국이 패망한 5세기 이후부터 현재의 독일 민족인 알라만족이 자리 잡고 살던 곳이다. 부침을 거듭하다가 17세기부터는 독일과 프랑스가 여러 차례 번갈아 가며 이곳을 지배했다. 17세기 중반에는 30년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가 알자스를 차지하지만, 19세기에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이긴 독일이 알자스를 지배한다.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은 이때가 배경이다. 그러고 보면 이 작품은 철저하게 프랑스 시각에서 써졌다. 독일 입장에서 보면 마치 일본인 선생이 해방된 조선에서 마지막 일본어 수업을 한 셈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이 패해 알자스는 프랑스 땅으로 귀속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 알자스를 탈환하지만, 결국 전쟁에서 패한 탓에 프랑스의 영토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슈바이처도 국적이 독일에서 프랑스로 바뀌는 동안 고스란히 고초를 겪어야 했다. 프랑스는 독일 국적을 가진 그를 포로수용소에 감금했고, 독일은 그를 간첩으로 의심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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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자스 와인가도의 포도밭 풍경. 알자스와인생산자협회 제공

 


이러한 역사 때문에 알자스 와인 또한 다분히 독일적이면서도 프랑스적인 독특함이 있다.

서쪽엔 보주산맥이, 동쪽엔 라인강이 흐르는 알자스의 와인가도를 몇 해 전 여행했다. 북쪽 말렌하임부터 남쪽 탄까지 170여㎞에 걸쳐 길게 뻗은 길이다. 와인가도에는 그랑크뤼 밭 51곳과 동화에나 나올 법한 여러 중세 도시가 자리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모티프로 삼았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알자스는 프랑스에서 가장 건조한 포도산지 가운데 하나다. 보주산맥이 서쪽의 비바람을 막아주는 덕이다. 북위 47~49도에 위치해 청포도와 피노누아를 주로 재배하지만 온화한 날씨 덕분에 포도가 충분히 영근다. 프랑스의 다른 지방보다 화이트 와인과 내추럴 와인을 많이 생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토양도 특이하다. 13종류의 토양이 모자이크처럼 펼쳐져, 같은 품종의 포도라도 토양에 따라 개성이 다른 와인이 생산된다. 주로 독일에서 재배하는 리슬링, 게부르츠트라미너와 피노그리, 뮈스카 등의 포도를 빚어 향기롭고 상큼한 와인을 만든다. 이 네 품종을 알자스에서는 ‘귀족 포도’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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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슈바이처의 모습. 위키미디어 제공

 


그랑크뤼 와인은 (예외가 있지만) 이 네 품종 가운데 단일 품종으로 와인을 만들어야 한다. 독일에서는 이들 품종으로 스위트한 와인을 주로 만들지만 알자스 와인은 대부분 드라이하다. 독일 와인처럼 길고 날씬한 플루트형 병에 담긴 알자스 와인에는 프랑스의 다른 지방과는 달리 라벨에 품종도 표시한다. 이 경우 100% 단일 품종만 사용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알자스 와인은 프랑스 와인보다는 독일 와인과 더 닮았다.

필자가 여행한 6월은 마침 하얀 아스파라거스가 제철이었다. 처음 본 하얀 아스파라거스와 뮈스카 품종으로 빚은 와인을 곁들여 마셨는데, 과연 최고의 마리아주였다. 소시지와 감자에 절인 양배추를 곁들인 슈크루트 가르니를 리슬링과 함께 맛보기도 했다. 한국의 독일 맥줏집에서 맛본 사우어크라우트와 비슷한 요리다. 어디 이뿐이랴, 감자와 고기를 알자스 와인에 재워 오븐에 구운 베코프는 피노그리(화이트)와도 피노누아(레드)와도 잘 어울렸다. 게다가 알자스식 화덕 피자 타르트플랑베와 전통 방식으로 빚은 스파클링 와인 크레망달자스도 조합이 일품이었다. 과연 알자스는 와인과 음식의 고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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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자스 그랑크뤼 와인에 사용되는 귀족 포도 4종으로 빚은 와인의 라벨. 왼쪽부터 리슬링, 게부르츠트라미너, 피노그리, 뮈스카. 알자스에서는 주품종 8가지(리슬링, 피노블랑, 게부르츠트라미너, 피노그리, 피노누아, 실바너, 뮈스카 프티 그랑블랑, 뮈스카 오토넬)와 보조 품종 4가지(샤르도네, 샤슬라, 오세루아 블랑, 클레브너 드 하일리겐슈타인)를 허용한다. 각 와이너리 홈페이지에서 캡처

 


한바탕 폭풍 같았던 시간을 보내고 스트라스부르에 여장을 풀었다. 밤은 깊어가고 피곤한데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낮에 ‘데귀스타시옹’이라고 적힌 와인 가게에서 시음하고 가져온 방당주 타르디브와 셀렉시옹 드 그랑노블을 꺼낼 수밖에. 알자스 특산품인 묑스테르 치즈와 푸아그라 파테를 곁들여 불면을 달랬다.

그 뒤로 해마다 노벨상 시즌이 되면 불면의 그 밤이 떠오른다. 그날 왜 잠이 오지 않았을까. 올해 노벨평화상은 누가 받을까. 어느 나라의 슈바이처일까, 아무 나라의 이명준일까. 어느새 알자스식 와인잔을 앞에 놓고는 알자스, 슈바이처, 도데와 둘러앉아 잔을 채운다.

정도를 걷는 얼론인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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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0/09 [08:47]  최종편집: ⓒ 정책평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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