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존재는 거짓이 아니다

김종분 | 기사입력 2018/02/11 [10:07]

너의 존재는 거짓이 아니다

김종분 | 입력 : 2018/02/11 [10:07]

 너의 존재는 거짓이 아니다

 

김영민의 논어 에세이 ⑪ 실증과 재현

후대의 모범이 될 만한 모델을

주나라 문화라는 이름으로

재현하는 게 공자의 목적이었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언명이

 

 


고고학적 증거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공자를 대뇌 망상가라 
서둘러 결론 내릴 필요는 없다



한겨레

영국의 표현주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인간의 이목구비를 강한 붓질로 휘저어버린 그림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아무리 거칠게 그 누군가의 이목구비를 알아버릴 수 없을 정도로 휘저어 버릴지라도, 그의 작품 속엔 재현의 대상이 된 누군가가 오롯이 존재한다. 위키피디아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에게 공자는 그저 진부한 상징이다. 정우성급의 미남이 아닌 한 개량한복을 입고 소개팅에 나가 공자님 운운하면 다음번 데이트 약속을 잡기 쉽지 않을 것이다. 간신히 데이트를 해서 열애에 빠졌다고 해도, “공자가 가라사대” 운운하면 천년의 발정도 식을 것이다. 연애가 무르익어 프러포즈를 하게 되더라도, “도가 다르면 함께 도모하지 않는다”(道不同不相爲謀)는 <논어> ‘위령공’(衛靈公) 구절을 읊지는 말라. 차라리 “내가 죽으면 사랑하는 당신이 홀로 남겨질 것이기에, 아무리 지쳤어도 나는 죽지 않소”라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읊어라. 그렇게 하는 게 승낙받을 확률이 높다.

한때 시대와 불화했던 당대의 힙스터였던 공자가 이런 지경이 된 데에는, 중국이 공자의 이미지를 정치 선전도구로 사용해온 오랜 전통, 그리고 그 전통에 대한 5·4 신문화 운동의 비판 탓이 크다. 그리고 오리엔탈리즘으로 무장한 서구인들 역시 동양을 치매에 걸린 거인처럼 묘사하는 과정에서 공자를 보수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동양인들은 옛것을 좋아하며, 그것을 갱신할 내적 동력이 없어, 동양인들의 삶의 풍경은 바뀌지 않아, 움직이지 않는 마차에 앉아 있는 거 같아….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공자는 소위 동양 문화의 진부한 보수성을 상징하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주로 거론되어온 <논어>의 구절이 바로 ‘술이’(述而) 편에 나오는 “(전해 내려오는 예(禮)를) 따르고 새로 만들지는 않는다”(述而不作)라는 공자의 말이다. 이러한 공자의 “보수적인” 생각을 비웃어 댄 사람은 일찍부터 있어 왔다. 이를테면 묵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예(?)는 활을 만들었고, 해중(奚仲)은 수레를 만들었고, 교수(巧垂)는 배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지금 가죽, 갑옷, 수레, 배를 만드는 이는 모두 군자가 되고, 그것들을 처음 만든 예, 해중, 교수는 모두 소인이란 말인가? 사람들이 지금 따르고 있는 것은 언젠가 누군가 새로 만든 것임에 틀림없다.” 즉, 새로 만들지 말고 옛것을 따르라는 공자의 생각은 말이 안 된다. 그 좋다는 옛것도, 그게 출현할 당시에는 새로 만든 것이었을 테니까. 물론 이런 묵자의 비판은 공정하지 않다. 공자가 옛것이라고 무턱대고 다 좋다고 말한 것은 아니므로. 공자는 여러 옛것 중에서 특히 주(周)나라 초기 문화를 찬양했다. 공자에 따르면, 주나라 초기 문화는 죽은 조상보다는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었고, 혈통보다는 덕성을 중시했고, 과도한 비용을 들이지 않고 예를 수행하는 것을 강조했고, 허례허식보다는 진심어린 태도를 구현하고자 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찬란했던 문화로 돌아가야 한다.

“후대의 판타지를 희미한 과거에 투사”

그런데 공자의 이런 복고적 태도를 근본적으로 재고하게끔 만드는 혁신적인 주장이 학계에서 제기되었다. 중국 고대사 전문가 로타 폰 팔켄하우젠은 공자가 주나라 초기에 융성했다고 간주한 이상적 문화의 모습이, 공자가 말한 것보다는 훨씬 근(近)과거의 모습임을 밝혀냈던 것이다. 그에 따르면, 주나라 성립 후 첫 두 세기 동안 주나라는 근본적으로 상(商)나라(약 기원전 1600~1046년) 전통을 답습했다. 서주(西周) 후기 즉, 기원전 850년께에 이르러야 비로소 주나라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예에 기초한 새로운 질서를 고안해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종족 조직 내의 변화와 인구변동을 반영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팔켄하우젠은 주장했다. 즉, 공자가 주나라 초기 문화의 특징이라고 말했던 내용은 사실 공자의 생전보다 두 세기 전부터 시작하여 공자 당시, 그리고 공자 사후 반세기 정도 시기까지 지속되었던 공자 당대의 문화였던 것이다. 요컨대, 공자는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과정에서 먼 과거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했다기보다는 자기 당대에 유행한 어떤 흐름에 과거의 이름을 덧씌운 것이다.

< 논어>에 나온 말들을 금과옥조로 모셔오던 사람들은 이런 파격적인 주장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까칠하기로 유명한 학자 팔켄하우젠은 자기 주장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키우는 개 불알에 붙은 진드기를 떼는 것 같은 집요한 자세로 청동기 관련 데이터를 집적하고 분석했다. 다시 말해서 팔켄하우젠은 <논어>라는 문서 자료에만 의존하지 않고, 청동기 유물과 같은 물리적 자료까지 철저히 고증을 했기 때문에 그토록 혁신적인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치 문서자료에만 의존해온 기존의 한국경제사 연구를 넘어서기 위해 후대 학자들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통계자료를 구축했던 것처럼. 그리고 문서자료 읽기에 치중해 왔던 기존 중국 역사 연구를 넘어서기 위해, 하버드대학에서 40만명에 가까운 방대한 중국 역사인물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것처럼.

이제는 제한된 문서자료만 들여다보고 있다고 역사 연구를 잘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났는지도 모른다. 차세대 학자들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여 방대한 양적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야 하고, 통계 처리된 결과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하고, 일반 문서와는 사뭇 다른 물리적 자료들을 다룰 줄 알아야 하고, 양적 데이터를 활용하는 사회연결망 분석 프로그램 사용법을 배워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곧 기존 연구에서 핵심적이었던 텍스트 정밀 독해를 완전히 대신하는 것일까? 팔켄하우젠은 청동기 연구의 역사적 가치를 증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논어>에 나온 공자의 언명을 과감하게 재단하기까지 한다. 그에 따르면 주나라 초기 문화를 찬양한 공자의 언명은 일종의 허구이며, 후대의 판타지를 희미한 과거에 투사한 것에 불과하다. 심하게 말하면, 팔켄하우젠은 <논어>에 나오는 주나라 문화에 대한 찬양을 아무런 실증적 근거가 없는 공자의 대뇌 망상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했다.

한겨레

<논어>에 나온 주나라 문화에 대한 공자의 언명은 실증적인 차원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예술적인 재현일 가능성이 높다. 위키피디아

공자의 언명은 예술적인 재현일 가능성 높아

팔켄하우젠의 이러한 냉정한 평가는 그가 신봉하는 실증적 정신을 잘 보여주지만, 과연 이것이 <논어> 텍스트에 대해 내릴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결론일까? 통계자료나 물리적인 사료로부터 얻어낸 발견들을 충분히 고려하는 동시에, <논어> 텍스트를 좀더 풍요롭게 해석할 수 있는 다른 접근법은 없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그 케케묵은 텍스트 정밀 독해로 결국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는지 모른다. 고전의 정밀 독해에 임하는 사람들은, 텍스트를 반드시 실증적인 차원의 보고서로 다루지는 않는다. 많은 텍스트들은 실증적 차원을 넘어선, 어떤 면에서는 “예술적”이라고 부를 만한 다차원적 언술로 가득 차 있다. <논어>에 나온 주나라 문화에 대한 공자의 언명 역시 주나라 문화에 대한 실증적인 차원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예술적인 재현(representation)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예술적 재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룹 빅뱅의 지드래곤은 “박물관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을 보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나한테는 야하게 느껴지더라. (…) 음악을 만들면서 그 작가의 그림을 찾아보며 이래저래 영감을 많이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뭉개진 얼굴을 그린 인물화로 유명한 프랜시스 베이컨의 어느 부분이 야하게 느껴졌을까? 베이컨은 생전에 가학적이며 피학적인 성관계로 유명한 예술가였고, 아무리 그림으로 돈을 많이 벌어도 자청해서 매춘에 종사하기까지 한 평범치 않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그림이 야해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야할 때는, 그가 어떤 한계를 시험할 때다. 베이컨의 그림은 어떤 한계를 시험했나?

인간의 이목구비를 강한 붓질로 휘저어버린 베이컨의 그림에 대해, 질 들뢰즈는 대상을 그린다기보다 대상을 가능케 하는 힘을 그린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이컨은 추상을 그리지 않고, 구체적인 그 무엇을 그렸다. 아무리 거칠게 그 누군가의 이목구비를 알아버릴 수 없을 정도로 휘저어 버릴지라도, 재현의 대상이 된 누군가가 거기에 오롯이 있다. 그래서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 베이컨의 그림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왜곡에도 불구하고 베이컨의 그림들은 대상을 닮아 있다. (…) 베이컨의 초상화는 자아의 한계에 대한 질문이다. 어디까지 왜곡해도 개인은 그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가? 자신이 자신이기를 그치게 되는 경계는 어디인가?” 이러한 맥락에서, 오더블유제이(O.W.J.)라는 필명의 평론가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은 자아의 경계가 어느 지점인지를 시각적으로 확인하는 지표”라고 단언했다.

재현은 드러내는 동시에 감춘다

이러한 자아의 한계에 대한 실험은 졸업사진을 찍는 현장에서도 벌어진다. 졸업을 앞둔 많은 학생들은, 사진촬영 당일 아침에 미용실에 가서 일생에서 가장 진한 화장을 하고 캠퍼스에 나타난다. 대학 시절 내내 그 학생들이 그 정도로 화려한 화장과 스타일링을 한 것을 본 적이 없기에, 나는 그 학생들이 다가와 인사를 해도 누군지 쉽게 알아보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 학생들이 무작정 자신을 탈바꿈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졸업사진이 갖는 딜레마는 자신이 최대한 예쁘게 나와야 하는 동시에, 대학 시절 기록물이므로 자신이 누군지 알아볼 수는 있게끔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화장을 하지 않으면 예쁘게 찍히지 않고, 지나친 화장으로 자신의 얼굴을 심하게 왜곡해 버리면, 아무도 졸업앨범에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화장을 하며 자아의 한계에 대해 묻는다. 어디까지 화장을 할 때, 나는 내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가? 졸업사진이란 그런 자아의 한계를 탐구한 예술적 재현물이다.

주나라 문화에 대한 공자의 태도 역시 선택적이었다. “많이 듣고, 그중에서 선한 것을 택하여 따른다.”(擇其善者而從之, <논어> ‘술이’ 편) 자신의 거친 피부를 그대로 보고하는 것이 졸업사진의 목적이 아니듯이, 주나라 문화를 실증적으로 보고하는 것이 공자의 목적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후대의 모범이 될 만한 모델을 주나라 문화라는 이름으로 재현할 것인가가 공자의 목적이었다. 그렇다면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언명이 고고학적 증거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공자를 대뇌 망상가라고 서둘러 결론 내릴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죄로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게 된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읽을 때, 어느 학자처럼 “그 쪼이는 고통도 컸겠지만 간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해서 체내 NH₃의 농도가 높아졌을걸. 그거 때문에 더 힘들었을 거야”라고 가르칠 필요는 없다. 신문 칼럼난에 나와 있는 필자의 증명사진이 실제보다 너무 젊어 보인다고, 당신은 뱀파이어냐고 따져 물을 필요도 없다. 평생 남을 졸업사진을 잘 찍기 위해 정성껏 화장을 하고 나온 학생에게, 짙게 화장한 너는 평소 모습과 다르므로, 너의 존재는 거짓말이다, 라고 폭언을 할 필요도 없다. 재현은 실증이 아니다. 재현은 드러내는 동시에 감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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