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더 스키' 성지가 된 '설국'의 무대
일본 스키 발상지 니가타현 묘코 누적 적설량 3m 넘는 스키장 수두룩 홋카이도보다 덜 춥고 한산해 매력적 소설 『설국』이 탄생한 일본 니가타(新潟)현은 그냥 ‘눈의 나라(雪國)’가 아니다. ‘눈의 천국’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눈만 보면 심장이 뛰는 스키어·스노보더에게 말이다. 일본 열도 중 최북단인 홋카이도(北海道) 못지않게 많은 눈이 내리면서도 춥지 않은 날씨 때문이다. 니가타현 남동부의 묘코(妙高)고원에서 차원이 다른 눈을 맛보고 왔다.
일본 스키의 발상지
니가타는 일본 스키의 발상지다. 현대스키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오스트리아가 100년 전 일본에 스키를 전해줬다. 주인공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테오도르 폰 레르히(1869∼1945) 육군 소령.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방문한 그는 1911년 일본군에 스키 타는 법을 알려줬다. 현재 니가타에는 스키장이 56개를 헤아린다. 니가타에서 레르히를 우상처럼 떠받드는 건 자연스럽다. 그를 기리는 동상과 일본 스키 기념관이 조에쓰(上越)시 다카다 외각 카나야산(金谷山) 기슭에 있다.
조에츠시 바로 밑에 묘코시가 있고 서쪽에 웅장한 산들이 어깨를 걸고 있다. 묘코산(2454m)을 주봉으로 하는 묘코고원이다. 묘코에서 자동차로 1시간만 남하하면 98년 겨울올림픽 개최지인 나가노(長野)가 나온다. 니가타현에서 겨울올림픽이 열린 적은 없지만 강설량 만큼은 나가노나 1972년 겨울올림픽 개최지인 삿포로(札幌) 못지않다. 일본의 전국 스키장 강설량을 알려주는 스노재팬 사이트를 보니, 2월20일 현재 적설량 3m 이상인 니가타 스키장이 14개에 달했다. 홋카이도에는 적설량 3m를 넘는 스키장이 6개, 나가노에는 5개 뿐이었다. 소니 패밀리가 만든 스키장
사실 아라이리조트는 새로 생긴 스키장은 아니다. 소니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1993년 소니 창업주인 모리타 아키오의 장남 모리타 히데오가 ‘아라이 리조트 앤 스파’를 지었다. 그는 손수 지은 최고급 스키장에서 세계적인 스키어를 초대해 함께 활강을 즐겼다. 한데 암운이 닥쳤다. 2000년대 들어 소니의 기세가 꺾였고, 일본 경기침체로 스키 인구가 급격히 줄었다. 결국 아라이는 2006년 폐업을 선언했다. 약 10년 간 흉물스럽게 방치됐던 아라이를 주목한 게 롯데였다. 2015년 18억엔(약 180억원)에 리조트를 인수한 롯데는 2년간 보수 작업을 거친 뒤 2017년 12월 스키장을 다시 열었다.
1월20일 니가타공항에 내려 아라이리조트로 향했다. 객실에 도착하자마자 스키복으로 갈아입었다. 오후 4시. 산 정상부로 향하는 곤돌라 운행은 멈췄다. ‘롱런 코스’ 하단부, 약 1㎞ 길이 슬로프에서 스키를 탈 수밖에 없었다. 이 코스만이 오후 4시부터 8시까지 열려서다. 아라이리조트에는 슬로프 11면, 리프트 4개, 곤돌라 1개가 있다. 슬로프 수는 비발디파크 스키월드(강원도 홍천)와 비슷한데 리프트·곤돌라는 도리어 적다. 하나 단순 수치 비교는 아무 의미 없다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금세 어둑해졌다. 첫날이니 몸만 풀자는 심정으로 딱 다섯 번 활강했다. 기온이 높고 최근에 눈이 많이 안 내려서인지 설질이 놀랄 정도는 아니었다. 김상민 아라이리조트 총지배인은 “최근 이상 고온인데다 눈도 많이 안 내려 슬로프가 다소 습한 편”이라면서도 “정상부에 올라가면 고운 밀가루 같은 파우더 설질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무를 공격합시다”
1월21일 오전 8시 30분. 스키장 영업이 시작하자마자 곤돌라를 탔다. 리조트 직원인 야스다 토모 마케팅팀장과 대학시절 알파인 국가대표를 지낸 이토 타츠야가 동행했다. 해발 1280m, 정상부에 도착했다. 1.4㎞짜리 앙코르 코스에서 몸을 푼 뒤 최장 코스인 롱런 코스(5.2㎞)에 도전했다. 허벅지가 터질 듯했지만 동시에 묘한 쾌감이 차올랐다. 설질은 어제보다 훨씬 좋았다. 스키가 덜그덕거리는 느낌이 없었고 숫돌에 칼 가는 소리가 났다.
‘FK’ 구역을 찾았다. V 자형 좁은 계곡이었다. 한국의 딱딱한 슬로프에서만 스키를 타다가 밀가루처럼 고운 눈을 헤치고 나가려니 쉽지 않았다. 조금만 힘 조절을 잘못하면 스키가 눈 속으로 파고들었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기도 어려웠다. 부드러운 눈을 부드럽게 헤쳐나가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5.2㎞ 코스를 활강하는 것보다 파우더 스노에 적응하는 게 더 힘들었다.
오후부터 눈이 몰아쳤다. 이튿날 새벽까지 멈추지 않더니 19㎝가 쌓였다. 누적 적설량이 4m를 넘었다(2월21일 현재 522㎝). 신설(新雪)에서 또 다른 차원의 파우더 스키를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됐다. 오전 8시 30분, 이토 타츠야를 다시 만났다. 그와는 스마트폰 번역 어플로 대화를 나눴다. 이토가 “해피 플레이스로 갑시다”라고 했다. 어제 못 가본 비압설 구역이다. 새로 쌓인 눈은 19㎝였지만 무릎까지 푹푹 잠겼다. 파우더 스키가 조금 적응돼서인지 할 만했다. 인적 드문 숲속을 헤치고 나가는 기분이 묘했다. 삭삭, 휘휘. 스키가 눈을 밀고 가는 소리마저 고요했다.
해피플레이스를 빠져나와 다시 리프트를 탔다. “최상, 스키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이번엔 나무를 공격합시다.” 나무 사이로 활강을 즐기는 트리런(Tree run)을 하자는 말이다. 이름 모를 키 작은 나무와 자작나무, 삼나무를 휘감고 도는 건 보통 슬로프에서 즐기는 활강과 차원이 달랐다. 겨울마다 일본으로 스키 원정을 가는 이들의 심정을 알 만했다. 비행시간이 임박할 때까지 파우더 스키를 즐겼다. 작별 인사를 나누며 이토가 휴대전화를 보여줬다. “다음에도 함께 미끄러집시다!” <저작권자 ⓒ 국민정책평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관련기사목록
|
인기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