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장이 무너뜨린 사법부 권위… 검찰 칼끝에 놓이다

권오성 | 기사입력 2018/06/19 [10:47]

대법원장이 무너뜨린 사법부 권위… 검찰 칼끝에 놓이다

권오성 | 입력 : 2018/06/19 [10:47]

 

대법원 재판거래 의혹 수사 착수 사법부 최고기관에 수사 칼날, 美·佛 등 선진국선 상상 못할 일

프랑스 대법원의 대법정에선 매년 1월 초 신년하례회가 열린다. 법대(法臺)에는 대법관들이 일렬로 줄지어 앉는다. 이 행사엔 대통령도 대체로 참석한다. 그런데 대통령은 법대 옆 의자에, 법무장관 등 정부 최고위 관료들은 법대 밑 좌석에 나란히 앉아 행사를 지켜본다. 프랑스 대법원의 권위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미국 연방대법원 권위도 그에 못지않다. 2005년 9월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백악관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최선임 대법관 앞에서 취임 선서를 했다. 부시 대통령은 증인의 하나로 뒤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로버츠 대법원장이 나흘 뒤 연방대법원에서 두 번째 취임선서를 할 때도 비슷했다. 최선임 대법관 앞에서 '헌법 준수'를 선서한 뒤 첫 번째 변론을 진행했다. 부시 대통령은 대법원을 찾아 선서식을 지켜보고 법정 귀빈용 의자에 앉아 재판을 방청했다. 사법부에 대한 일종의 경의(敬意) 표시다. 미국인들은 그런 장면을 보면서 대법원의 권위를 느끼게 된다.

미국인들은 대법원장과 대법관 8명을 흔히 '지혜의 아홉 기둥'이라 부른다. 미 대법원이 그동안 낙태, 사형제, 동성 결혼 등 찬반양론이 극명히 갈린 사안들에 대한 판결을 통해 사회적 갈등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도 권위를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선진국 대법원이 검찰 수사를 받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법원장 출신 변호사는 "역사상 전례도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대법원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 검찰은 18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대법원 산하)의 권한 남용과 '재판 거래' 의혹에 대한 수사에 들어갔다. 우리 사회의 마지막 보루인 사법부 최고 기관의 운명이 행정부 외청(外廳)인 검찰의 칼끝에 놓인 것이다.

사건 수사는 대기업 수사 등 굵직한 사건을 주로 맡는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가 맡았다. 부장검사 출신 변호사는 "검찰은 대법원은 물론 이 의혹에 연루된 판사들의 사무실과 자택 등을 압수 수색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양 전 대법원장과 그가 임명했던 전·현직 대법관들도 줄줄이 피의자 혹은 참고인 신분으로 검찰 포토라인에 선 뒤 조사받을 가능성이 있다. 수사 과정에서 대법원을 둘러싼 여러 확인되지 않은 얘기들이 흘러나와 기정사실로 굳어지는 일들도 발생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대법원 신뢰는 추락할 수밖에 없다.

이 사태는 김명수 대법원장이 사실상 자초한 것이다. 애초 이 의혹을 조사한 대법원 특별조사단은 지난달 25일 "'양승태 법원행정처'가 정권에 우호적인 판결들로 상고법원 도입에 소극적인 청와대와 거래를 시도한 문건을 만들었다"면서도 "문건이 실행되지 않아 형사처벌할 사안은 아니다"고 밝혔다. 그러나 3일 뒤 김 대법원장이 "고발도 검토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의혹이 증폭됐다. "고발해야 한다"는 소장 판사들과 "그래선 안 된다"는 중견 판사들 의견이 충돌했다. 그런데 김 대법원장이 "검찰 수사에 협조하겠다"고 사실상 수사 의뢰를 하면서 검찰 수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 사안은 뇌물 수수 등 판사들의 개인 비리가 아니라 사법 행정과 관련된 것이다. 잘못이 있다면 처벌해야 하지만 보기에 따라서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이다. 한 변호사는 "법원 내부 문제를 조사까지 해놓고 스스로 결론 내리지 못하고 검찰에 맡긴 것부터 무책임하다"며 "결국 앞으로 벌어질 혼란과 사법 신뢰 추락에 대한 책임은 김 대법원장이 져야 한다"고 했다.

지난 11일 열린 직급별 판사 모임인 법관대표회의에서도 이 같은 우려가 나왔다고 한다. 수도권 지방법원에 근무하는 한 판사는 회의에서 "우리 판사들이 앞다퉈 재판 거래 의혹이 사실인 양 인정하는 듯한 공개 발언을 해 법원 권위를 스스로 깎아내리고 있다"며 "아내도, 주변 사람들도 요즘 내게 '눈치 보며 재판하느라 힘들겠다'고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요즘 저는 판사가 아니라 무슨 마피아 조직원으로 의심받는 것 같다. 판사는 목숨 걸고 재판하는 직업이라는 신념으로 지금껏 버텨왔던 저나 대다수 판사의 자긍심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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