밟히고 또 밟혀도… 묵묵히 견디다

김종분 | 기사입력 2018/08/17 [10:03]

밟히고 또 밟혀도… 묵묵히 견디다

김종분 | 입력 : 2018/08/17 [10:03]

 

물 위에 떠 있는 섬 무섬마을 / 세상과 이어지는 유일한 통로 외나무다리 / 일제 저항하던 마을청년들 / 돌아오지 못한 통곡의 다리 / 最古의 자리 극락전에 내준 무량수전 / 108 계단 오르고 올라 만난 풍경은 단연 최고 / 최초 서원 소수서원서 퇴계의 큰뜻 되새겨

조선시대 예언서 정감록에서 전쟁이나 재난이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십승지 중 한 곳으로 꼽은 곳이 소백산 아래 자리 잡은 풍기다. 십승지 10곳 중 첫 번째로 여겨지는 명당이다. 살기 좋은 곳으로 꼽힌 곳이니 찾는 외지인이 많았다. 지금처럼 터전을 옮겨 새로운 곳에 정착하는 것이 수월한 때가 아니니 마을에 새로운 얼굴이 나타나면 관심을 받게 된다. 하지만, 십승지 풍기엔 전국에서 많은 이주민이 모여들었다. 이주민의 출입이 많은 곳이므로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려는 이들에겐 이만한 장소가 없었을 것이다.

세계일보

대한광복단 기념공원의 추모탑.


◆관심에서 멀어지는 아픈 역사

1910년 경술국치 후 일제는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감행했다. 1919년 3·1운동 때까지 10년을 일제강점기 중 무단통치기로 분류한다. 결사와 집회 그리고 언론의 자유를 박탈당했다. 길에서 두 사람이 만나 이야기만 해도 잡혀갔을 정도로 입과 귀를 막고 손발까지 묶어버렸다.

그래도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마저 꺾지 못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비밀단체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추진했다. 일제강점기 초기 국내 독립운동단체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활동범위가 넓었던 단체가 바로 대한광복회였다. 이 단체의 전신인 대한광복단이 결성된 곳이 경북 영주의 풍기다. 이주민이 많으니 새 인물에 대한 관심이 적어 의심을 덜 받은 것이다. 경북 상주에서 풍기로 이주한 채기중의 주도로 1913년 유창순, 유장렬, 한훈, 김상옥 등 우국지사들이 가입해 활동했다. 이들 대부분이 영주가 고향이 아닌 외지에서 모여든 이주민이었다. 다른 지역 독립운동이 지역과 가문을 기반으로 활동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세계일보

대한광복단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한 채기중.


이들은 군자금 확보를 위해 일본인 광산이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다. 1915년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조선국권회복단 일부 인사와 대한광복회를 결성해 무장투쟁에 나섰다. 군자금 모집, 혁명기지 건설, 친일부호 처단, 독립군 양성 등을 목적으로 비밀, 폭동, 암살, 명령 등 4대 행동강령을 채택해 무장투쟁 활동을 전개했다. 1917년 친일부호인 영남의 장승원 처단 등 잇단 거사로 조직의 이름이 알려졌다. 결국 검거에 나선 일제에 의해 주요 인물들이 체포됐고, 감옥에서 순국해 조직이 거의 와해됐다. 조직이 와해됐더라도 대한광복회에 몸담았던 이들은 이후 독립운동에 앞장섰는데,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김상옥과 백야 김좌진 등이 대표적이다.

대한광복회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한 인물들이 익숙한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독립군 양성과 무장 항일투쟁의 선구자적 역할을 한 이들이 있었기에 향후 의열단 투쟁, 만주의 독립운동 등이 빛을 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활동이 덜 알려진 것처럼 이들의 흔적도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경북 영주에서 이들의 활동을 되짚을 수 있는 곳은 대한광복단 기념공원 정도다. 공원의 전시실은 5테마로 대한광복단의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1전시실은 경술국치 전후 대표적인 독립운동을 소개하고 있다. 2전시실은 대한광복단의 결성과 주요 활동 등을, 3전시실은 대한광복단을 계승한 단체와 의의 등을 전시해놨다. 4전시실은 영주의 다양한 독립운동사를, 5전시실은 대한광복단과 대한광복회의 주요 인물 채기중, 박상진, 김상옥 등의 활동 내역 등을 소개하고 있다. 전시실 외부에 조성된 공원엔 대한광복단 추모탑과 기념비 등이 전부다.

세계일보

근대역사문화거리의 영광이발관.


당시 영주 시내에는 대한광복단이 모은 군자금을 만주로 보내는 역할을 했던 대동상점이 있었다. TV드라마에서 애국지사들이 물건을 사는 척하며 몰래 군자금을 건네받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역할을 한 곳이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한의원 건물로 변해 당시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나마 그 주변이 근대역사문화거리로 등재돼 옛 흔적의 일부는 보존될 듯싶다.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에는 1930∼1960년대 건물인 옛 영주역 5호 관사와 7호 관사, 근대 한옥, 영광이발관, 풍국정미소 등이 있다. 지은 지 100년도 안 되는 건물들이지만, 철거해 새 건물을 세우기보다 보존을 택했다. 지금이야 오래되지 않은 역사여서 희소성이 적지만, 이를 보존하면 후대에는 역사가 될 것이다.

세계일보

경북 영주 무섬마을 모래사장과 천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


영주에서 독립운동 얘기를 하면 무섬마을을 빼놓을 수 없다. 내성천이 감싸안으며 흐르는 무섬마을은 물 위에 떠 있는 섬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내성천을 ‘S’자로 건너는 외나무다리가 이곳을 대표한다. 모래사장과 천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는 한 명이 간신히 지나다닐 정도로 좁다. 과거엔 이 다리가 더 좁았다고 한다. 과거에 비해 지금은 고속도로라고 주민들은 얘기한다. 다리가 ‘S’자가 된 것은 불과 10년 전이다. 그 전에 직선이었는데, ‘외나무다리축제’를 하며 형태를 바꿨다.

지금이야 추억을 쌓을 수 있는 외나무다리지만, 일제강점기 때는 마을 청년들이 독립운동을 하다 붙잡힌 채 건너던 다리다. 무섬마을은 350년 전 반남박씨가 자리 잡고, 이후 선성김씨가 들어와 이룬 집성촌이다. 100가구도 안 되는 무섬마을이지만 독립운동 서훈을 받은 이들만 다섯명이나 된다.

세계일보

무섬마을 아도서숙.


대표적인 인물이 김화진이다. 김화진은 일본에서 학교에 다니다 귀국한 1928년 아도서숙이라는 학교를 세웠다. 반상,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가르쳤고, 학생들은 영주 청년동맹, 신간회 영주지회, 영주농민조합 등의 단체에서 항일운동에 나섰다. 일제는 아도서숙이 생긴 이후 5년간 세 차례나 마을을 포위한 뒤 독립운동을 하던 이들을 붙잡아 갔다. 결국 아도서숙은 개교 5년 만인 1933년 일제에 의해 불태워졌다. 김화진은 투옥과 고문 후유증으로 해방 직후 숨을 거뒀다.

세계일보

경북 영주 부석사.


◆긴 세월 풍파 이겨낸 오래된 풍경

영주는 최고, 최초란 단어와 연관이 깊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었던 부석사 무량수전은 1970년대 초 최고(最古)의 자리를 안동 봉정사 극락전에 내줬다. 현재 건축물의 중수(수리) 시기를 보고 역사를 따졌다.

무량수전은 1916년 일제강점기 때 해체, 수리하면서 발견된 묵서명에 ‘1376년(고려 우왕 2년)에 중창되었다’고 적힌 글이 나와,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 됐다. 약 60년이 지난 1972년 극락전을 해체 복원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서 고려 공민왕 때인 1363년 지붕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발견됐다. 불과 13년 차이지만,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알려졌던 부석사 무량수전은 중수 시기가 앞선 극락전에 최고의 자리를 넘겨줬다.

세계일보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만나는 곳에 들어선 부석사 아래로 펼쳐진 산너울 풍광을 보면 딴 세상에 있는 것 같다.


무량수전에 오르면 최고의 자리를 논하는 게 사실 큰 의미가 없어진다. 건물이야 극락전이 오래됐지만, 풍광은 무량수전과 비교할 수 없다.

천왕문부터 무량수전까지 이어진 108계단을 오르다가 안양문에 이르면 허리를 한 번 굽혀야 무량수전 앞에 설 수 있다. 계단을 다 오른 뒤 만나는 석등의 자리가 묘하다. 법당 왼쪽에 치우쳐 있다. 자연스레 몸은 공간이 더 많은 오른쪽으로 향한다. 석등을 지나자 어렴풋이 이유를 알게 된다. 법당 안 불상 소조여래좌상의 자리가 왼편이다. 법당 정면이 아닌 왼편에 자리 잡아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 중생들을 자연스레 법당 오른쪽 입구로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일보

경북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배흘림기둥부터 석등 위치까지 뭐하나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다만, 무량수전에서 뒤돌아 보는 풍광에서는 이 자연스러움이 깨진다.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만나는 곳에 들어선 절집 아래로 펼쳐진 산너울 풍광은 딴 세상을 떠올리는 게 한다. 내려오는 길에 지장전 마당에서 다시 무량수전을 바라보자. 안양루 지붕이 무량수전 지붕에 안겨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세계일보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설립한 뒤 퇴계 이황이 조정에 건의해 소수서원으로 사액됐다.


무량수전은 최고의 자리를 잃었지만, 순흥면의 소수서원은 최초의 서원이다.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은 성리학자인 안향을 배향하는 사당을 1543년 설립한 뒤 사당 동쪽에 사설 교육기관 백운동서원을 설립했다. 이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은 조정의 지원을 요청했고,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는 뜻의 소수란 이름을 받았다.

세계일보

소수서원 앞을 흐르는 죽계천 바위에 새겨진 ‘경(敬)’자.

 

세계일보

단종 복위를 꿈꿨지만 실패한 금성대군 신단.


주세붕이 서원을 세운 순흥은 조선 초 전국 75개 도호부의 하나였을 정도로 큰 지역이었다. 하지만 ‘역적의 땅’이 되면서 한순간에 몰락했다. 세조는 즉위 후 단종을 영월로, 반기를 들었던 동생 금성대군을 순흥으로 유배보냈다. 금성대군은 이곳에서 단종 복위를 꿈꿨지만 실패했고, 남자는 모두 죽임을 당할 정도로 순흥도호부는 그야말로 피바다가 됐다. 이때 많은 이들이 소수서원 앞에 있는 죽계천에 수장됐다고 한다. 순흥도호부도 폐부되고, 풍기에 흡수됐다. 주세붕이 서원을 세울 때 죽계천 바위에 유교의 근본사상인 ‘경(敬)’자를 새겼는데,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억울하게 죽은 원혼을 달래려고 붉은 칠을 한 뒤 울음소리가 그쳤다고 한다. 소수서원 인근에는 금성대군에게 제를 올리는 신단이 조성돼 있다. 성리학을 중히 여긴 주세붕이 이곳에 서원을 세운 이유가 단순히 학문 증진만을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 도배방지 이미지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