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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한 소탕작전에 “군이 기여 안 하면 위신 문제가” 궤변
 
권오성   기사입력  2018/10/11 [10:30]

 계엄군 무력진압 실행 앞서

작전 필요성 검토 보고서

시민들을 잠재적 간첩 간주

아전인수식 해석이 대부분

특전부대 ‘하면 된다’ 신조 등

모든 측면서 ‘즉각 소탕’ 결론

“군의 사기 위해 필요” 궤변

작전 과정과 성과에 대해선

“악몽 끝나고 새 아침 시작”

‘적군’ 물리친 듯한 기술 가득


1980년 5·18민주화운동은 열흘째인 27일 계엄군의 무력진압으로 일단락됐다. 계엄군의 마지막 작전명은 ‘상무충정’이었다. ‘무예 숭상’을 뜻하는 상무(尙武)에 ‘충실하고 올바르다’는 충정(忠正)을 더한 것이다. 모순적인 작전명 아래 시민들이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전두환 신군부의 <제5공화국 전사>를 검토한 결과, 이는 시민들을 잠재적 ‘고정간첩’으로 간주하고, 군 사기와 ‘하면 된다’ 신조 등을 고려해 결정된 것으로 확인됐다. 군대가 시민을 짓밟은 날은 ‘악몽이 끝나고 새 아침이 시작된’ 날로 기록했다.

<5공 전사>는 본문 4편 ‘광주사태’ 장에서 ‘계엄군의 작전단계’를 별도로 다뤘다. 분량만 65쪽에 이른다. 이와 함께 13쪽에 걸친 ‘5월26~27일’ 경과를 참고하면 당시 작전의 전모가 드러난다.

이 작전은 논의 단계부터 ‘죄다 없애 버린다’는 ‘소탕’ 작전으로 불렸다. 민주화운동에 나선 시민들을 소탕해야 할 ‘적군’으로 본 것이다. 작전 결정은 속전속결이었다. 계엄군은 금남로 집단발포(21일) 다음날부터 광주를 고립된 ‘섬’으로 만드는 봉쇄작전을 폈다. 23일엔 육군 진종채 2군 사령관과 김준봉 작전참모가 무력소탕작전 계획안을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에게 건의했다. 동시에 육군본부 이종구 작전처장도 움직였다. 그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하나회’ 핵심 멤버다. 이 작전처장은 아예 ‘소탕작전’을 여러 측면에서 검토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가 일반에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소탕작전’ 검토 보고서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 보고서였다. 보고서는 작전·교육·국군 신뢰·현 정부 지원 등으로 나눠 소탕작전의 필요성을 따졌다. 모든 측면에서 ‘즉각적 무력소탕작전이 필요하다’고 했다. 작전 면에선 “끝까지 발악하다가 지하잠입 또는 산악지로 은신하여 고정간첩으로 전향할 가능성이 있다” “침투하는 무장간첩과의 접선이 가능하다”며 시민들을 잠재적 ‘간첩’으로 봤다. 군 정신교육 면에선 “강력한 응징을 해야 한다는 지휘부 지시와 강조가 허위(가) 된다” “사기가 저하되고 단결력이 이완된다” “특전부대 특유의 ‘하면 된다’ 신조의 허구화 우려가 있다”며 작전 필요성을 강조했다. 작전을 하지 않으면 “국제적 차원에서 군의 무능과 무책임감을 비난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거나, “법치주의 기풍을 위해 해야 한다”는 등 ‘아전인수격’ 해석이 대부분이다. “군은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을 때 과연 군의 위신은 어떻게 될 것인가”라며 ‘군 위신’을 시민 살상의 근거로 들기도 했다.

이 작전처장은 보고서를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최측근 정도영 보안처장에게 넘겼다. <5공 전사> 1687쪽에는 이에 정 처장이 ‘동감’을 표시하면서 국방부 보안부대장에게 ‘지시’해 주영복 국방장관에게 조기 무력진압을 조언토록 했다고 적혀 있다. 전 전 대통령이 이끈 보안사가 무력진압의 초기 단계부터 개입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24일 이 작전처장은 이희성 총장에게 작전을 건의한다. 최종 결정회의는 25일 열렸다. 주 장관, 이 총장, 1·2·3군 사령관, 특전사령관과 함께 보안사참모장도 참석해 만장일치로 찬성했다고 돼 있다. <5공 전사>엔 빠져 있지만,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확정된 12·12와 5·18 판결을 보면 전 전 대통령도 이 회의에 참석했다. 전 전 대통령에게 후일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면을 일부러 누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경향신문

<제5공화국 전사> 부록 2편 700쪽에 실린 1980년 5월26일 육군본부작전지침(상무충정작전). 수기로 작성된 문서에 군사 Ⅱ급 비밀 도장이 찍혀 있다.


소준열 전교사령관에게 육본 작전지침이 하달된 것은 26일이다. <5공 전사> 부록 700쪽에는 수기로 작성된 당시 육본 작전지침이 수록돼 있다. ‘군사 Ⅱ급 비밀’이라는 비밀등급 도장이 찍힌 문서다. 육본은 당시 상황을 “지역 내의 폭도들의 상당수가 살인, 방화 등의 흉악범 및 불량배들로 구성” “불순분자 내지 북괴무장공비 침투 가능성이 증대되고 있음”이라고 적었다. 작전개시 일시에 대해선 ‘별명(別命)이 없는 한 1980년 5월27일 00시01분 이후에 실시할 것’이라고 했다.

작전은 바로 개시됐다. 26일 오후 광주의 주요 외국인 23명을 미국 공군기를 이용해 오산으로 이동시켰다. 밤 11시쯤 특공조들이 이동을 시작했다. 이 총장은 전교사령관의 작전개시 보고에 ‘성공을 비오’라고 한 것으로 나온다.

<5공 전사>는 5월27일 ‘상무충정’ 작전에 공수특전여단 병력 중 314명을 선발, 투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3공수 79명(장교 13명/사병 66명), 7공수 201명(장교 20명/사병 181명), 11공수 34명(장교 4명/사병 30명) 등이다. 3개 공수여단에는 각각 전남도청, 전일빌딩·관광호텔·YWCA, 광주공원이 공격목표로 부여됐다. 특공대원들은 M-16소총과 수류탄, 가스탄으로 무장했다. 3공수는 번개탄(특수화학탄)도 휴대했다.

27일 새벽 3시를 전후해 본격적인 무력진압이 시작됐다. 11공수는 3시30분에 진입해 30분 만인 새벽 4시 전일빌딩과 관광호텔을 점령했다. 뒤이어 YWCA 건물 앞에서 30여명과 교전했지만 “그것도 결국 쉽게 제압”했다고 돼 있다. 7공수는 비어 있던 광주공원을 점령했다. 3공수도 시민군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도청을 1시간여 만에 장악했다. 2.5m 높이의 도청 담벽을 로프를 타고 넘어 진입, 새벽 4시5분부터 5시10분 사이 ‘교전’을 벌였다고 적혀 있다. 이날 새벽 계엄군 공격으로 사망한 사람은 17명, 체포된 사람은 230여명으로 나온다.

작전의 과정과 성과에 대해선 ‘적군’을 물리친 듯한 기술이 가득하다. 군의 집단발포 후 낡은 무기를 손에 쥔 민간인들에 대해 “폭도들은 특공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고 자화자찬했다. 상무충정작전을 마친 뒤의 상황은 “악몽과 같은 ‘광주사태’가 끝나고 새로운 아침이 시작된 것”이라고 했다. 계엄군은 “광주시를 무정부 상태의 수렁에서 구제해 낸” 존재로 표현됐다.

대법원은 상무충정작전에 대해 전 전 대통령 등의 ‘내란목적살인죄’를 유죄로 인정했다.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시민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시위대와의 교전이 불가피해 필연적으로 사상자가 생기게 되므로, 이러한 사정을 알면서 재진입 작전의 실시를 강행하기로 하고 이를 명령한 데에는 살상행위를 지시 내지 용인하는 의사가 있었음이 분명하다.”(대법원 96도3376) 전 전 대통령은 38년 동안 이에 대해 사과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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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10/11 [10:30]  최종편집: ⓒ 정책평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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