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러시아 충돌, 왜 지금인가

노종관 | 기사입력 2018/11/28 [09:30]

]우크라이나-러시아 충돌, 왜 지금인가

노종관 | 입력 : 2018/11/28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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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로 포로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6일(현지시간) 계엄령 승인 의회 표결을 앞두고 연설하고 있다. 키예프|로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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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가 26일(현지시간) 러시아 접경지 등 10개 지역에 30일간의 계엄령을 선포했다. 러시아 해군이 전날 크림반도 옆 케르치 해협에서 우크라이나 군함 3척을 나포하고 선원 23명을 억류한 지 하루 만이다. ‘왜 지금인가’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우크라이나는 2014년 크림반도 사태가 불거지면서 러시아군이 침공했을 때도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았다. 이듬해 동부 지역에서 친러시아계 분리주의 세력과의 군사 충돌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포로셴코, 왜 지금 계엄령인가

우크라이나 의회는 페트로 포로셴코 대통령이 제출한 계엄령 발동 대통령령을 이날 승인했다. 전체 의원 450명 중 276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포로셴코는 표결 전 연설에서 계엄령이 승인되면 28일 오전 9시부터 발효될 것이라고 밝혔다. 당초 포로센코는 우크라이나 전역에 60일간의 계엄령을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의회 반발에 밀려 수위를 낮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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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계엄령 적용 지역. 분홍색 원. 자료 : 키예프포스트

 


러시아 정부 지원을 받는 러시아투데이 방송은 “우크라이나에서 군사 충돌이 가장 치열했던 2014~2015년에도 계엄령은 없었다”면서 “포로셴코는 상대적으로 사소한 충돌을 문제 삼아 계엄령을 발동했다”고 비판했다. 우크라이나 일간 키예프포스트도 “러시아 침공 이후 5년이 다된 지금 와서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은 이상하다는 지적이 많다”고 보도했다.

포로센코가 정치적 목적으로 사태를 키우려 한다는게 중론이다. 내년 3월 대선이 임박했지만 포로셴코 지지율은 8%에 불과하다. 율리아 티모셴코 전 총리, 코미디언 겸 배우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등 후보군 중 가장 인기가 없다. 수년째 계속되는 경제난 탓이 크다.

포로셴코는 러시아의 위협을 강조하고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하는 데 희망을 걸었다. 제과 재벌 출신으로 러시아와도 활발하게 거래했던 그가 지금은 애국투사를 자처한다. 내년 대선 슬로건으로 그는 ‘군, 언어, 신앙’을 내걸었다. 포로셴코가 지난 4월 우크라이나 교회가 러시아 정교회와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며 ‘영적 독립’을 추진하고 나섰을 때도 대선을 노린 움직임이라는 분석이 많았다.포로셴코가 계엄 권력을 선거용으로 휘두르거나 아예 대선 자체를 연기하려 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의회는 이날 표결에 앞서 포로셴코 대통령에게 계엄령을 이용해 시민 권리를 억압하거나, 내년 대선을 연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계엄 상황에서 의회의 힘은 제한된다. 우크라이나 출신 언론인 맥심 에르스타비는 워싱턴포스트에 기고에서 “우크라이나 계엄령은 민주주의에 대한 사형 선고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비록 ‘제한적인’ 형태라 할 지라도 비상 권력은 그 스스로를 연장시키는 경향이 있다. 우크라이나처럼 민주주의가 취약한 나라는 그런 경향이 특히 강하다”고 지적했다.

■이례적인 군사 행동

크림반도와 러시아 타만반도 사이에 있는 케르치 해협은 전략 요충지다. 케르치 해협은 흑해와 아조프해을 잇는 유일한 항로다. 이곳을 봉쇄하면 우크라이나 경제에 압박을 가할 수 있다. 아조프해 북부 항구 베르단스크와 마리우폴이 우크라이나의 곡물·철강 수출과 석탄 수입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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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시점이다. ‘왜 지금인가’라는 의문은 러시아에도 적용할 수 있다. 2003년 양국은 아조프해와 케르치 해협을 공동 수역으로 지정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크림반도 병합 이후 러시아가 해협 통행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주장하고 나섰지만, 우크라이나 선박의 출입을 가로막지는 않았다. 사전 신고와 승인을 요구하는 수준에 그쳤다.

몇 가지 위기 징후는 보였다. 러시아는 지난 3월부터 해협을 통행하려는 우크라이나 선박을 엄격하게 검열하기 시작했다. 직전 우크라이나가 크림반도에서 러시아 어선을 억류한 것을 빌미삼았다. 지난 5월에는 해협 위로 크림반도와 타만반도를 연결하는 크림대교(케르치대교)가 개통했다. 개통식날 푸틴은 러시아제 트럭을 몰고 직접 다리를 건넜다. 강제 병합한 크림반도 영유권 의지를 과시하는 동시에 우크라이나를 도발하는 행위였다. 개통식 이후 크림 지역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 크고 작은 충돌이 잇따랐다.

그럼에도 이번 선박 나포는 이제까지의 충돌과 의미가 다르다. 러시아군이 직접 나서 물리력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2014년 크림 사태 당시 러시아 상원이 군사 개입을 승인한 사례를 제외하고 러시아가 공개적으로 우크라이나에 군사력을 동원한 경우는 없었다. 크림 사태 때나 직후 벌어진 돈바스 내전에서 러시아 군대가 친러시아 분리주의 세력을 지원하고 있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됐지만 러시아 당국은 이를 모두 부인했다. 우크라이나 출신 언론인 맥심 베르시드스키는 모스크바타임스 기고에서 “러시아는 공개적으로 군사력을 동원해 우크라이나 선박을 공격하고 나포했다. 우크라이나가 이를 전쟁 행위로 받아들여도 과장은 아니다”라고 적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계엄령 발동에 명분을 제공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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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해안경비대에 나포된 우크라이나 군함과 예인선 등 선박 3척이 26일(현지시간) 크림반도 동부 케르치 항구에 정박돼 있다. 케르치|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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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기 파고든 러시아

왜 지금 와서 러시아가 이례적으로 공개적인 군사 행동에 나섰는지 해석이 분분하지만, 명확한 답은 없다. 다만 러시아가 최적의 타이밍을 잡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워싱턴포스트는 국내외 상황에 비춰 러시아가 갑작스럽게 움직인 배경을 분석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22일 조사에서 지지율 56%를 기록했다. 1년전 조사에 비해 10%포인트 떨어졌다. 푸틴 지지율이 60% 아래로 떨어진 건 5년 만에 처음이다. 지난 6월 시작된 연금 개혁 후폭풍이다. 푸틴은 경제제재로 인한 재정난을 해소하기 위해 연금 받는 나이를 늦추는 방안을 승인했다. 남성의 경우 2028년까지 현재 60세에서 63세로, 여성은 2034년까지 현재 55세에서 63세로 연금 수령 시기를 늦추도록 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와 충돌해 유권자들의 시선을 돌리려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제정치적으로도 러시아의 선박 나포는 시점이 나쁘지 않다. 서방에서 가장 격렬하게 러시아와 대립해 온 영국은 지금 브렉시트 문제로 바쁘다. 러시아 문제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미국 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중간선거 이후 하원을 장악한 민주당과 대결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대선에 러시아가 개입했다는 의혹에 대한 수사도 계속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유럽연합(EU)과 캐나다, 폴란드가 러시아의 선박 내포를 비판하는 성명을 낼때 까지도 미국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면서 “다른 나라들의 성명이 나오고 몇 시간 뒤에야 니키 헤일리 유엔 대사가 러시아의 ‘불법 행위’를 비난하는 성명을 냈다”고 전했다.

■서방의 고민

러시아도 우크라이나도 사태가 필요 이상 커지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만약 전면 군사충돌이 벌어지면 우크라이나에 승산은 없다. 경제적 타격도 크다. 러시아 역시 서방의 더 가혹한 제재를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적절한 수준에서 양국간 긴장이 고조되는 것은 포로셴코나 푸틴이나 반대할 이유가 없다. 내부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하고 지지세를 결집할 수 있다.

오히려 서방사회가 향후 대응이 고민일 수 있다.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도, 무시하기도 어렵다. 미국 싱크탱크 대서양위원회 선임연구원 브라이언 오툴은 26일 “서방사회가 제재 유혹에 쉽게 빠져서는 안된다”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선박 나포를 문제 삼아 경제제재를 강화한다면 러시아 뿐 아니라 서방 사회도 치러야 할 경제적 비용이 작지 않다고 지적했다. 제재 대상이 될 러시아 금융기관이나 재벌들은 미국과 EU를 포함해 세계 곳곳에서 거래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러시아는 제재가 가동된다 해도 손쉽게 해제 요건을 충족할 수 있다. 나포한 선박과 억류한 선원을 풀어주고, 해협 검열만 중단하면 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일단 제재가 해제된 다음 다시 해협 검열 등을 재개할 수 있다. 그러나 서방사회는 한번 적용했다가 해제한 제재를 다시 적용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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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극우 활동가들이 27일 키예프 시내에 모여 러시아의 선박 나포를 규탄하고 있다. 러시아 기업 소유인 시내 쇼핑몰 ‘오션플라자’ 출입을 봉쇄하고 있다. 키예프|A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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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방관할 수도 없다. 우크라이나 의회는 계엄령 발동을 승인하면서 서방사회에 즉각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선박 나포를 통해 서방의 개입 의지를 시험한다고 분석한다.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스티븐 파이퍼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서방이 본격적인 제재에 나서려 한다면 러시아는 손쉽게 이번 사태에서 발을 뺄 수 있다. 반면 서방의 반응이 강하지 않다고 느낀다면, 그들은 공세를 이어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오툴은 제재를 한다면 보다 광범위하고 전략적인 제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3월 영국에서 벌어진 세르게이 스크리팔 암살 사건을 명분삼아 러시아를 우선 제재할 수 있다고 했다. 최근 미국 국무부는 스크리팔 사건과 관련해 “러시아 연방이 생화학무기 통제 및 전쟁종식법(CBW)에 따른 조건을 충족했음을 증명할 수 없다”고 의회에 통보했다. 국무부는 이에 따라 러시아에 추가제재를 부과하겠다는 입장이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될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오툴은 또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계속되고 있는 무력충돌을 완전 종식시키는 것을 목표로 잡고 제재를 강화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지역에서는 2014년 크림병합 직후부터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친러시아 분리주의 세력 간 전투가 벌어졌다. 같은해 9월 당사자들이 모여 정전을 선언하는 민스크협정에 서명했지만 실질적인 효과는 없었다. 지금까지 전투가 계속되면서 사망자만 1만명이 넘었다. 러시아가 이 지역 분리주의 세력을 부추기고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오툴은 러시아에 민스크협정 붕괴의 책임을 묻고, 새로운 평화협정을 맺는 것을 조건으로 제재를 강화하는 것이 선박 나포를 명분으로 삼는 것보다 효과적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러시아의 무력 공세에 수동적으로 끌려갈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황 변화를 위한 계기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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