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고 시어머니 친지들과 인사하는 특이한 곳

이은경 | 기사입력 2019/01/01 [11:03]

벌거벗고 시어머니 친지들과 인사하는 특이한 곳

이은경 | 입력 : 2019/01/01 [11:03]

 [더,오래] 장윤정의 엄마와 딸 사이(5)

결혼 이후 참으로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중요했던 것들이 더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고, 마치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접하게 되는 낯선 상황들이 참 많았다. 그게 나쁘다, 좋았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냥 내가 되어 몇 년이 흘렀다.

그런 변화 중 하나가 시댁이라는 것이 생겼다는 것이다. 맘 카페를 둘러보면 시댁에 '시'자만 들어가도 그 게시물엔 조회 수나 댓글이 유난히 더 많이 달리는데, 참으로 다양한 시어머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시댁이라는 것도 결혼생활에 중요한 일부분이다. 남의 이야기라 쉽게 읽고 넘기기 일쑤지만 당사자는 상당히 괴로운 일인 사연들이 참으로 많다.

나의 시어머님은 화통하다. 털털하고 여장부에다 욕도 잘하시고 “아이고 아프다” 하기보단 “난 일하는 게 즐거워! 가만히 있으면 답답하다” 하시며 종일 바쁘게 목욕탕이며 가게 일이며 집안일이며 하신다. 지방에 사시다 보니 명절에 두 번 보는 게 전부이고 임신했을 적엔 그마저도 오지 말라고 하셨더랬다.

신랑이 장남이고 아래로 나랑 동갑인 도련님이 있다. 한 번은 명절 인사차 친정엄마와 안부 전화를 하셨는데 “며느리도 보셨으니 제사 준비도 거들게 하시고 좀 쉬세요”라는 말에 어머님은 “어휴 아까워서 어떻게 그래요”라고 하셨단다. 일을 시키면 닳을까 아까운 며느리가 바로 나였다.

중앙일보

[그림 장윤정]

 



그런 마음이 당연하다곤 나도 생각지 않아서 아이가 조금 크고 난 두돌 이후에는 큰맘 먹고 아이와 단둘이 기차를 타고 사흘 정도 시댁에 머물다 오기도 했다. 그래 봤자 정말 큰맘 먹고 간 그때 이후 좀처럼 자신이 없어 그저 명절이 되면 신랑 따라 내려갔다 올라오는 게 전부였다.

친정에 갔다 돌아올 땐 엄마가 “그래 잘 가. 다음에 또 와”한다면, 시어머님은 그늘진 얼굴로 애써 웃으시며 “조심히 잘 가라” 하셨다. 그리고 일 바지 위에 헐렁하게 일하기 편해 입은듯한 티셔츠 밑단을 말아 잡아 눈물을 훔치셨다.

마지막 명절엔 네 살 난 딸의 손을 꼭 쥐고 어머님 입이며 볼에 비비시면서 “난 손녀랑 꼭 해보고 싶은게 있다” 하시기에 “뭐요?”하고 물으니 “목욕탕에 같이 가고 싶다”라고 하셨다. “아 네”하고 대답하고 서울에 와서 그 말이 왜 그리 자꾸 생각이 나던지 추석이 다가올 즈음에 신랑에게 아이랑 먼저 시댁에 내려가겠다고 했다. 무뚝뚝한 신랑이 고맙다, 어쩐다 표현은 안 했지만 몇번이나 표를 확인하며 예매해주었다. 내심 좋았나 보다.

중앙일보

[그림 장윤정]

 



나흘 정도 아이랑 둘이 있다가 신랑이 오면 사흘 더 일주일을 머물며 명절을 보내고 올라오는 긴 여정이었다. 짐을 꾸리고 아이에게 예쁜 옷도 사입혀 기차를 타고 시댁에 도착했다. 대충 짐을 풀자마자 “어머님 내일은 몇시에 목욕탕 가세요? 저희도 같이 가요”하며 내가 기차를 타고 먼저 내려온 이유를 실행에 옮겼다. “아침 10시쯤 가지”하는 어머님 대답을 듣고 다음 날 아이와 어머님을 따라나섰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정기권을 끊어 매일 단골 목욕탕을 가시는 건 익히 들어 일고 있었다.

시골스러운 2층엔 여관을 같이 운영하는 산호탕에 도착했다. 나는 친구와도 부끄러워 절대 목욕탕을 가지 않는데 시어머님과 가는 목욕탕이 쉬운 선택은 아녔다. 키가 갑자기 크는 바람에 등 전체에 난 튼 살 자국은 나에게 학창시절 내내 보이기 싫은 콤플렉스였고, 출산 후 늘어진 뱃살이나 수술 자국도 나에겐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이제는 65살이 되신 시어머님에게 내가 할 수 있는 효도는 이런 게 아닐까 싶어 일 년에 고작 두 번 보는 손녀와 목욕탕에 가고 싶다는 그 소박한 바람을 꼭 이뤄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웬걸. 이것이 지방 목욕탕의 문화인지 아니면 모든 목욕탕엔 이런 그룹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목욕탕 입구부터 모든 사람이 어머님 지인이었다. 인스타그램으로 치자면 팔로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나는 연신 처음 보는 사람들과 알몸으로 인사했고, 자리를 잡고 겨우 앉았을 땐 세신사가 나를 불렀다. 아이 키우느라 편하게 세신 한번 받았을 리 없는 며느리를 위한 스페셜한 예약이었다. 어머님 지인 앞에서 알몸을 맡길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세신은 시작되었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로 시선은 갈 곳을 잃고 목욕탕 천장에 맺힌 물방울들을 향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국수처럼 나오는 때가 부끄러워 “죄송해요. 목욕탕을 거의 안 가서요. 힘드시죠”라고 했고 세신사는 웃으며 “서울 살면 바쁘다 아인교. 못 가지 못 가. 괘안타”라고 하셨다. 세신이 끝날쯤 오이를 곱게 갈아 얼굴에 얹어 주셨는데, 나도 오랜만에 느긋하게 세신 받고 마사지까지 받는다는 게 내심 나쁘지 않았다.

중앙일보

[그림 장윤정]

 



살짝 릴렉스해지는 참에 딸아이가 오이 팩이 얹어진 초록색 내 얼굴을 보며 무섭다고 울기 시작했다. 알몸에 초록 오이를 얹은 나는 오이 팩 때문에 어눌한 발음으로 “엄마 괜츠나. 금븡 끝나. 기드려”하고는 빨리 이 시간이 지나길 바랐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웃긴 상황이었지만 그날은 어찌나 당황스럽고 세신 받는 시간이 길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목욕탕에 갔다. 목욕탕 드라이기에 넣을 동전이 없으면 어머님 지인에게 얻어 넣기도 하고, 목욕탕에 비치된 헤어롤을 아이의 머리에 전부 끼워주기도 했다. 목욕탕에 갈 적마다 어머님 지인들께서 뚱뚱한 바나나 우유며 요플레 주스를 주셔서 바리바리 싸서 돌아왔다.

평상에 앉아 고구마도 먹고 달걀도 먹었다. 아주 소소하고 평범한 하루하루였다. 나에겐 서울의 시간과는 다른 조금 지루하고 느린 시간이었다. 나는 그저 어머님의 일상을 함께 했다. 시어머님이 가장 원했던 날들을 함께 보냈다. 여행도 외식도 아닌 어머님의 일상 속에. 일 시키기도 아까운 며느리와 세상 하나뿐인 손녀가 따뜻하게 녹아 들어오는 것, 어머님이 가장 원했던 평범하지만 특별한 하루하루였다.

중앙일보

[그림 장윤정]

 



사실 그 일주일간의 시댁행이 힘들었다. 배엔 가스가 잔뜩 차고 빨래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아이는 장난감도 없어 오로지 나만 찾아댔다. 외출도 잘 못 했고 갈 곳도 없었다. 심지어 마지막엔 신랑과 조금 다투기도 했다. 이번 시댁행에서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 싶은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고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 매일 아침 10시 마치 엄마와 딸, 그 딸의 딸 셋이 집에서 나와 깔깔 웃으며 갔던 목욕탕 가는 길이다. 목욕탕 입구에서 표를 끊으며 오늘은 한장이 아닌 나와 아이 몫까지 끊는 시어머님의 목소리와 표정, 모두에게 나를 자랑스레 소개하던 모습들이 잊히지 않기 때문이다.

곧 설날이 다가온다. 이번엔 한 발 더 용기 내 말해야지 “어머님 제가 등 좀 밀어 드릴게요”

중앙일보

[그림 장윤정]

 

정도를 걷는 얼론인이 되겠습니다.
  • 도배방지 이미지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