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철도건설은 1888년 조-미 협상에서 시작됐다

최윤옥 | 기사입력 2019/02/13 [09:09]

한반도 철도건설은 1888년 조-미 협상에서 시작됐다

최윤옥 | 입력 : 2019/02/13 [09:09]

 구한말 주미공사관과 미국 정부간 외교기록 발굴

1888년대 경인선 철도부설 계약서 초안과 논의자료 확인

한반도 철도역사 시원 앞당기는 획기적 사료

공사관서 일했던 이상재 종손이 자료 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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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땅에 들어선 첫 근대 철도는 1899년 완공된 길이 27km의 서울-인천간 경인선이다. 조선 정부가 1890년대초 미국기업가 제임스 모스와 협상을 벌인 끝에 1896년 3월 모스에게 철도부설권을 넘겨줘 1897년 착공했고, 일본이 다시 모스한테서 공사권을 넘겨받아 완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랫동안 사실로 인정받아온 이런 통설이 깨어지게 됐다. 최근 발굴된 당시 조선-미국 정부간 외교문서에서 한반도 철도의 시원인 경인선의 건립 논의가 1890년대 경인선 건립 과정보다 훨씬 이른 1880년대 조-미 협상 때부터 진행됐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일제강점기 민족지도자로 활약한 독립지사 이상재(1850~1927) 선생이 1888년 주미국 조선국공사관(이하 공사관)에서 관원으로 일할 당시 활용, 기록한 외교문헌·사진자료 8점을 최근 후손으로부터 기증받아 검토한 결과 <미국공사왕복수록(美國公私往復隨錄)>이란 문서에 미국 쪽이 경인선 설치를 제안한 사실과 계약서격인 ‘철도약장(鐵道約章)’ 초안이 함께 실려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며 13일 관련 자료를 공개했다.

기증된 유물은 문헌자료 5점과 사진자료 3점이다. 특히 <미국공사왕복수록>과 <미국서간(美國書簡)>은 학계에 보고되지 않았던 미공개 사료들로, 당시 미국 정부와 협상 중이던 중요 현안업무와 공사관의 운영, 공관원들의 활동상 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유일한 현존자료다.

<미국공사왕복수록>은 공관원들의 ‘업무편람’ 에 해당한다. 1883년 당시 미 대통령 체스터 아더(Chester A. Arthur)가 초대 주한공사 루시우스 푸트(Lucius H. Foote)를 파견하며 고종에게 전달한 외교문서를 비롯해, 박정양 초대 공사가 미 정부 쪽과 주고받은 각종 문서들, 조선왕조-미국정부 간 각종 현안사업 관련 문서들, 업무에 필요한 각종 비망록 등으로 이뤄져있다. 표지를 제외하고 총 138쪽이며, 맨 처음 기록된 문서인 ‘미국답서 역한문(美國答書 譯漢文)’(1883년 2월 6일)을 제외하면, 그 시기는 주미전권공사 박정양이 워싱턴에 도착한 직후인 1887년 11월 27일부터 귀국 후 2년이 지난 1891년 7월까지 3년여에 걸쳐 있다.

특히 주목되는 건 당시 조-미 간 현안사업들을 담은 문건 안에 뉴욕 법관 ‘딸능돈’(달링턴) 등이 ‘조선기계회사’를 설립해 철로, 양수기, 가스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제안한 규칙과 약정서 초안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또 조선공사를 역임하며 한국 정부의 외교업무를 자문했던 미국인 알렌이 “규약초안의 내용이 좋다. 정부는 한푼도 내지 않지만 이것에 의거해 시행하면 경성이 번화스럽기가 세계 각국과 당일하게 된다”며 계약을 추천하는 의견서도 실렸다.

경인선은 1896년 조선왕조가 미국인 모스에게 부설권을 허가했으나, 모스가 1897년 5월 다시 일본 측에 권리를 넘겨 1899년 9월 일본 쪽이 완공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문화재청은 “이번 자료를 통해 이미 1888년 당시 주미공사관을 통해 미국 쪽과 철도부설 관련 사항을 논의하고 있었으며, 관련 계약서 조문까지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확인했다”고 밝혔다.

<…수록>에 실린 두 번째 문서인 ‘송미국외부조회(送美國外部照會)’(1887년 11월 27일)는 박정양이 공사파견의 전제조건으로 당시 종주국 중국에 내건 ‘영약삼단’을 무시하고 중국공사 장음환을 먼저 방문하지 않은 채, 미국 국무장관을 방문하겠다고 국무부에 직접 보낸 문서다. 1월 10일 그는 이완용?알렌?이채연 등을 대동하고 베이야드(T. F. Bayard) 국무장관을 방문해 국서 제정 일자를 협의하고 관례에 따라 조회문을 보내는 절차를 밟았다. 주미전권공사가 국제관례에 따라 자주국으로서 외교를 전개했음을 입증하기 위해 기록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당시 알렌이 이런 자주적 외교 의례를 자신의 주도로 했다고 주장하는 편지도 함께 <수록>에서 발견돼 눈길을 끈다.

<미국서간>은 이상재 선생이 주미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된 1887년 8월부터 1889년 1월까지 작성했던 편지 38통의 모음이다. 주미공사 서기관으로 미국에 파견된 기간 부모의 안부를 묻거나, 집안의 대소사를 논하는 등 개인사와 집안일에 관련된 것들이 주된 내용이다. 그러나 일부에 당시의 공사관 운영상황을 드러낸 구절이 보이고, 미국에 주재하는 동안 활동하거나 견문한 사항 혹은 느낀 점 등도 부분적으로 적고있어 당시 공사관 활동의 실상, 청년 외교관이던 월남의 활동상과 그의 미국관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기록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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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된 자료들은 월남의 종손 이상구(74세) 씨가 물려받아 간직해온 것들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주미대한제국공사관 복원과정에서 고증관련 사료를 찾던 중 존재를 알게됐다고 한다. 그뒤 전문가들의 검증 과정을 거쳐 소장자 이씨의 희망에 따라 지난해 12월 국립고궁박물관에 기증됐다.

이상재 선생은 1887년 주미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임명됐다. 박정양 초대주미공사와 함께 1888년 1월 미국 워싱턴에 도착한 뒤 같은 해 11월 박 공사와 귀국길에 오를 때까지 현지 공사관을 개설하는 등 공관원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했다. 학계는 공개된 자료들이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품 자료를 분석한 한철호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한국 근대철도 건설논의의 시원을 1880년대로 끌어올리는 획기적인 근거자료가 발견돼 의미가 크다. 주미공사관 관련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는데, 9세기 조선왕조의 생생한 대미외교활동을 공사관원이 직접 기록한 최초의 발굴자료가 나왔다는 점에서도 지대한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했다. 문화재청은 13일 오후 2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이상재 선생 기증자료들을 언론에 공개하고, 기증식을 열어 후손 이씨에게 감사패를 줄 예정이다.

하늘은 슷로 돕는자를 돕는다 지성이면 감천 민심이 천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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