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 날개 달아준 거대 갑부, 로스차일드는 어떻게 돈 모았나

이은경 | 기사입력 2019/02/15 [12:11]

쇼팽 날개 달아준 거대 갑부, 로스차일드는 어떻게 돈 모았나

이은경 | 입력 : 2019/02/15 [12:11]

 로스차일드가(家)는 역사상 가장 부유한 가족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 재산은 한때 현재가치로 약 50조 달러, 우리 돈으로 5경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쑹훙빙,『화폐 전쟁』). 나폴레옹 전쟁 이후부터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100년의 평화 시대가 가능했던 것은 로스차일드가(家)가 스스로 쌓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서 각국의 정부를 통제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세계의 역사를 움직였다는 로스차일드가

로스차일드라는 금융재벌의 역사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거주지에서 태어난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 (Mayer Amschel Rothschild, 1744-1812)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가족이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는 다양한 얘기들이 있는데 어떤 이는 그 얘기 중 ‘거짓을 판별하기는 쉽지만, 진실을 찾아내기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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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차일드 가문은 어떻게 5경이 넘는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을까? 아마 빌헬름 왕과의 인연, 나폴레옹 전쟁, 산업혁명의 영향과 관련있을 것이다. 사진은 1960년대 회사 집무실에 모여 앉은 로스차일드 가족들.

 



필자의 생각에는 다음의 3가지 요소와 그것들을 적절히 활용한 그들 가족의 능력이 그들이 쌓은 부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는 것 같다. 첫째는 유럽의 왕실 중에서 가장 부유했다는 프랑크푸르트 인근 카셀 지방의 제후 빌헬름 왕과의 인연이고, 둘째는 유럽을 뒤흔들어 놓은 나폴레옹 전쟁, 그리고 셋째는 전 세계 부(富)를 획기적으로 증가시킨 산업혁명이다.

마이어는 열두 살에 양친을 잃었고, 그러자 바로 학업을 멈추고 하노버의 한 유대인 은행가 밑에 수습생으로 들어갔다. 어린 나이였지만 꽤 오랫동안 그곳에 있으면서 그는 은행이 굴러가는 원리를 배웠고 덤으로 고(古) 화폐에 대한 지식도 얻었다. 19세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선대의 골동품상 겸 환전상을 다시 열었다.

당시 독일은 수많은 나라로 나누어져 있었고 각 나라는 서로 다른 화폐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환전의 수요는 컸다. 그리고 각국의 독특한 화폐를 수집하는 것을 취미로 하는 왕이나 귀족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고대 시절의 화폐에도 관심이 있었다.

마이어는 수습생 시절 쌓은 지식으로 환전업무 중 희귀한 고화폐를 분별해 낼 수 있었고 그것을 빌헬름에게 싸게 공급하여 그가 왕세자 때부터 친해졌다. 빌헬름의 신임을 얻은 마이어는 왕실을 출입하며 희귀한 물건, 사치품을 공급하였고 왕가뿐만 아니라 고관대작들과 금전 거래도 하였다. 사업은 번창하여 1786년에 이르러 유대인 거주지에서 가장 큰 건물을 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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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재벌 로스차일드 재벌의 시조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 ⓒPublic Domain



빌헬름 왕가는 대대로 용병장사로 부를 쌓은 것으로 유명했다. 병사를 뽑아 훈련해서 전쟁이 난 곳에 돈을 받고 보내 싸우게 했는데, 대의명분에 상관없이 값을 높이 부르는 쪽에 병사를 팔았고 어떤 때는 싸우는 양쪽에 용병을 보내기도 했다. 병사들이 낯선 곳에서 개죽음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상관하지 않았다.

빌헬름도 가문의 사업을 계속했다. 그는 용병의 대금을 보통 채권으로 받았는데, 마이어는 그의 채권을 할인해 주는 거래에 깊이 관여했다. 왕의 재산이 워낙 컸으므로 이에 관련된 업무만으로도 재산을 상당히 불릴 수 있었다.

마이어는 금융 거래에 집중하기 위해 1790년과 1800년 사이에 은행을 설립하여 업종을 변경하였다. 마이어는 할인한 만기 채권 회수관계로 유럽 여러 곳을 여행해야 했는데 이때 세상 돌아가는 것을 유심히 보면서 중요한 도시마다 자신의 하수인을 심어두어 업무의 편의를 도모했다.

빌헬름 왕의 주요 고객은 영국이었고, 그에 관련된 영국 국채 할인이 왕과 마이어의 주 거래였다. 이들 채권의 회수 관계로 영국을 몇 차례 방문했던 마이어는 당시 산업혁명의 결과로 싼값에 대량생산되던 영국의 면직물에 주목했다. 그는 은행업에 병행하여 무역업을 시작했다. 1798년에는 셋째 아들 나탄을 영국 맨체스터로 보내 무역업을 본격화했다. 영국에서 싸게 수입한 직물은 독일과 유럽 대륙에서 높은 수익을 가져다주었다. 이 사업도 번창하여 취급품은 커피, 염료 등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넬슨 제독의 영국 해군에 패한 후 대륙과 영국의 무역을 금지하는 ‘대륙봉쇄령’을 내렸고 그의 사업에 위기가 왔다. 그러나 위기인듯한 바로 그때 다른 쪽으로 기회가 찾아 왔다.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을 돕던 빌헬름의 왕국을 점령했고 황급히 피난을 떠나던 빌헬름은 마이어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겼다. 마이어는 기민하게 움직였고 빌헬름은 감탄했다.

프랑스군의 감시를 피해 외국에 있던 빌헬름과의 통신은 사돈을 통했고 거래 장부는 암호화했다. 그리고 왕이 소장했던 골동품과 고화폐를 파리시장에서 현금화했고, 왕의 전권을 위임받아 그의 채권에서 나오는 이자와 상환되는 원금의 관리를 영국으로 간 아들 나탄이 대행하게 했다.나탄은 이를 위해 런던에서 은행을 설립, 자금을 재투자하면서 정기적으로 유럽 여러 곳에 피신해 있던 왕과 그의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송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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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1세 - 헷세의 왕. 칼 구스타프 필로 그림. 헤세의 카셀 지방박물관(Museumslandschaft Hessen Kassel)소장



마이어가 유럽 각지에 심어둔 하수인 조직과 런던의 아들, 독일의 본가는 톱니처럼 돌아갔다.

프랑스군은 부자로 유명한 빌헬름의 재산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마이어의 가족은 프랑스군에 잡혀 들어가 심문을 당했다. 그러나 냉정한 이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빌헬름의 재산을 찾을 수 없었다. 마이어 자신의 돈은 좀 빼앗겼지만, 그와 고객의 주요한 재산은 채권이었으므로 그것은 부스러기에 불과했다.

나탄이 설립한 런던의 은행은 자기 자본금과 빌헬름의 재산만으로도 그 예탁 자산이 업계 최고수준이 되었다. 유럽의 다른 유력 자산가들도 나폴레옹을 피해 암암리에 나탄의 은행에 재산을 맡겨왔다. 전쟁 중 자금이 귀한 각국 정부는 고금리에도 돈을 빌리려 했다. 자금을 운용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로스차일드가(家)는 빌헬름과 고객에게 국채 수익률을 안겨주면서 수수료를 청구했다. 하지만 영국 국채보다 수익률이 높은 투자처는 많았고 나탄은 이를 적절히 활용했다. 추가 수익은 그들의 몫이었다. 빌헬름은 원금의 보존과 관련 뒤처리 업무에 불만이 없었고 다른 고객들도 다르지 않았다.

큰 자금을 등에 업은 로스차일드 가는 런던 금융계를 장악했다. 반 나폴레옹 진영의 리더로서 전쟁에 쓸 자금이 필요했던 영국 정부도 이들에게 꼼짝 못 했다.

또한 포르투갈, 스페인 등지로 퍼진 나폴레옹과의 전쟁터로 전쟁 자금을 송금하기 위해서는 유기적인 네트워크를 가진 로스차일드 가족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자금을 빌려주고 이자로 돈을 벌었고 그 자금을 옮겨주며 또 돈을 벌었고, 현지 통화로 바꿔주면서도 수수료를 챙겼다. 전쟁의 승패와 상관없이 부는 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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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탄 로스차일드 (Nathan Rothschild).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의 셋째 아들로 런던의 금융시장의 큰 손이 되었다



1815년 유배되었던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돌아오자 온 유럽이 긴장했다. 영국·프로이센 동맹군과 나폴레옹 군은 워털루 전쟁에 명운을 걸었다. 프로이센 군을 초기 전투에서 패퇴시킨 프랑스가 전쟁의 우위에 있는 듯했다. 워털루의 소식에 따라 영국 국채의 값은 요동쳤다. 전쟁에서 지면 영국 정부의 국채상환능력이 떨어지고 채권은 종잇조각이 될 수 있다.

승전보 먼저 알게된 나탄, 주가 조작

그러나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방어하는 가운데 퇴각했던 프로이센 군이 다시 돌아와 나폴레옹 군은 수적 열세에 몰렸고 전쟁은 동맹군의 승리로 끝났다. 승전보는 영국군 사령관 웰링턴의 부관이 직접 달려 런던으로 전했다. 하지만 비둘기까지 이용하는 로스차일드가의 네트워크가 더 빨랐다. 나탄이 승전 소식을 들은 것은 영국 정부의 공식 통신망보다 하루나 먼저였다.

나탄은 시장에서 먼저 보유하고 있던 영국 국채를 팔았다. 전황에 노심초사하던 시장은 큰손의 움직임에 투매로 따라왔다. 이때 다른 쪽에서 헐값의 채권을 사 모은 사람은 나탄의 대리인이었다. 다음날 영국의 승전보가 알려졌을 때 국채 값은 폭등했다. 이것은 나폴레옹이 로스차일드 가에 준 마지막 선물이었다.

나폴레옹 이후에도 대륙은 혁명이 끊이지 않아 불안했고 대륙의 재력가들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런던에 자신의 부를 보관하려 했다. 자산관리에 명성이 쌓인 나탄의 은행에 예탁 자산이 끊임없이 증가했다. 다른 쪽으로는 돈이 필요한 정부나 사람들이 줄을 섰다. 예대 금리차는 수익으로 떨어졌다. 런던의 큰 자금거래 중에 그들을 통하지 않는 것이 드물었고 자금중개의 수수료도 그들 장부에 쌓여갔다.

정치적으로 안정되었던 런던은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지로 공고해졌고 거기에 자리 잡은 로스차일드 런던 가족의 사업과 부는 잘 보존되어 이후 가문 사업의 본류가 되었다. 나폴레옹이 대륙을 장악하고 있었을 때 마이어는 파리의 중요성을 알아보았다. 나폴레옹 치하의 독일에서 친(親) 나폴레옹파가 생겼을 때 마이어는 그 우두머리와 관계를 쌓았다. 그를 통해 파리의 실력자를 소개받은 마이어는 다섯째 아들 제임스를 파리로 보냈다. 부를 쌓는 데는 적도 아군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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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프랑크푸르트 유대인 거주지 내의 있던 로스차일드 가의 건물. 로스차일드 가문의 본거지로 인정받고 있는데 2차대전 중 파괴되었다.



마이어를 정점으로 한 로스차일드 가족은 영국의 선진 경험을 통해 산업혁명의 전개방향과 그 결과를 내다볼 수 있었다. 그들의 파리 가족은 나폴레옹 이후 프랑스에 영국식 산업혁명을 이끌었다. 그때 산업 붐을 타고 급속히 늘어난 프랑스 전체 부의 상당 부분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수입이 되었다. 이미 로스차일드 가의 재산은 빌헬름의 재산을 훨씬 추월하였다.

마이어는 20명의 아이를 낳았고 반이 살아남았다. 그중 5명이 아들이었는데 큰아들은 프랑크푸르트 사업을 물려받았다. 나머지 4명의 아들 중 둘째와 넷째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빈, 나폴리로 가서 사업을 벌였다. 이로써 권력자의 손에 운명이 좌우되는 박해 받는 유대인 로스차일드 가의 사업은 분산되었고 위험은 줄어들었다. 5대 도시에 자리 잡은 아들들은 그곳의 왕족이나 실력자들과 재정적 관계를 공고히 하였고 각자의 지역에 산업혁명의 물결이 이어지도록 했다.

가문은 주요 도시의 돈줄을 움켜잡게 되었으며 그들의 국제 네트워크는 더욱 확고해졌고 이를 기반으로 선진 국제금융의 길도 열 수 있었다. 마이어는 재산의 보존에 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집안의 영업 기밀의 유지와 재산의 보존이 용이하도록 혼인도 삼촌과 질녀 간, 혹은 사촌 간에 행하였다.

로스차일드 가는 국제 금융시장의 정립에 기여하였고 그 시장 위에서 자금 조달이 용이하도록 하였다. 이때문에 당시 태동하던 산업혁명의 전개에 필수적인 투자 자금의 공급이 제때에 이루어졌고, 1780~1790년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시차를 두고 프랑스, 독일 나아가 전 유럽으로 더 쉽게 파급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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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차일드 가는 국제 금융시장에서 자금 조달을 용이하게 해 산업혁명을 도왔다. 영국 산업혁명 당시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모습을 그린 그림.

 


산업혁명으로 세계의 부는 빠른 속도로 늘어났고 그 늘어난 부의 상당 부분은 다시 돌아 로스차일드 가문의 사적인 부로 쌓였다. 금융업 외에 온갖 이권과 산업에 그들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수에즈 운하, 동인도회사, '드 비어'라는 잘 알려진 다이아몬드회사 그리고 보험, 광산, 철도, 무역, 와인 등등 손으로 다 꼽을 수 없을 정도이고 심지어 아프리카의 국가 짐바브웨의 설립에도 관여했다.

1800년대 중반부터 후반 사이에 가문의 부는 정점을 달렸다. 자본이 부를 낳는 전통적인 부의 창출 패러다임이 기술개발과 혁신적 아이디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옮겨가고, 족내 혼인 때문에 인재의 배출이 주춤하면서 로스차일드의 위세는 꺾였다. 그런데도 로스차일드 가(家)가 오늘날까지도 세계의 금융시장을 막후에서 지배하고 있다는 음모론적 이야기들은 뿌리 깊게 퍼져있다.

다음 편에서는 로스차일드 형제 중에서도 가장 큰 부를 축적했다는 파리의 제임스 로스차일드와 그를 만나고서 삶이 바뀐 쇼팽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정도를 걷는 얼론인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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