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재판장님’ 인사치레도 없이…두 피고인은 당당했다

김석순 | 기사입력 2019/03/25 [09:34]

존경하는 재판장님’ 인사치레도 없이…두 피고인은 당당했다

김석순 | 입력 : 2019/03/25 [09:34]

 

정의·진실 내세운 피고인들

경향신문

 


법정에 선 두 피고인은 당당했다. 한때 권력 최정점에 섰던 고위공직자나 정치인, 기업인도 형사재판을 받는 피고인으로 법정에 나오면 위축되기 마련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첫 재판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명박 전 대통령은 ‘무리한 기소’라고는 했지만 검찰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71)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60), 이 두 사람은 달랐다. 지난달 26일엔 양 전 대법원장이, 이달 11일엔 임 전 차장이 날선 단어를 써가며 검찰을 몰아붙였다.

“재판 하나하나마다 그 재판의 결론을 내기 위해 법관이 얼마나 많은 자료를 검토하고 깊은 고뇌와 번뇌를 거치는지에 대해 검찰은 전혀 이해가 없는 듯합니다. 그저 옆에서 들려오는 몇 가지 말이나 스쳐가는 몇 가지 문건을 보고 쉽게 결론을 내는 것으로 보입니다.”(양 전 대법원장)

“검찰이 수사과정에서 펼친 피의사실 공표를 통한 일방적인 여론전은 끝났습니다. 이제 사실관계를 규명하는 사실심의 첫 재판입니다. 공소장에 있는 검찰발 미세먼지로 형성된 신기루와 같은 허상에 매몰되지 말고 무엇이 진실인지 충실히 심리해주시기 바랍니다.”(임 전 차장)

사법농단 주역인 양승태와 임종헌

법정에 서자마자 검찰에 선전포고

변호인 선임하고도 기록 직접 살펴

검찰 주장 하나하나에 반박할 태세


100명 넘는 방청객이 수용되는 서울중앙지방법원의 넓은 법정에 두 사람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무죄라는 확신에서 나온 준비된 발언이었다. 말들 속엔 ‘정의’와 ‘진실’이라는 단어가 여러번 들어갔다. 피고인들이 흔히 쓰는 ‘존경하는 재판장님’이라는 말은 없었다. 앞으로 재판 과정에서 검찰이 씌운 굴레를 벗겠다는 선전 포고였다.

■ “법원행정처 문건은 일기장”

양 전 대법원장은 40년, 임 전 차장은 30년간 법관으로 지낸 법률 전문가다. 이들은 변호인을 선임하고도 검찰 수사기록을 직접 살피고 프레임을 짠다. 검찰 측 주장 하나하나를 그냥 넘길 수 없다고 보는 듯하다. 법리 공방은 지난 19일 임 전 차장 재판에서 먼저 시작됐다. 임 전 차장은 사법농단 사건의 핵심 증거인 ‘법원행정처 문건들’을 물고 늘어졌다. 문건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지는 가장 중요한 쟁점이다. 문건들에는 양승태 대법원의 재판거래와 재판개입 정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검찰은 이 문건들을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에게 작성하라고 시킨 게 범죄라고 본다.

핵심 증거인 ‘법원행정처 문건’을

‘브레인스토밍 차원’으로 규정하고

‘일기장’에 비유해 가치 폄하 시도


임 전 차장은 문건들을 “브레인스토밍 차원”이라고 규정했다. 정부와 국회에 대응하려고 구상한 아이디어를 담은 것에 불과하고, 실제 실행된 내용도 없어 가치가 떨어진다는 취지의 규정이다. 그는 생각의 자유를 형사처벌해서는 안된다고도 했다. “형법의 대원칙은 누구나 생각하는 것만큼 처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나 생각의 자유가 있는데 위헌·위법한 생각을 했다고 처벌해야 한다는 것은 형법의 대원칙에 반한다”는 게 그의 말이다. 이에 검찰은 “지시가 위법했다고 자인한 것”이라고 받아쳤다.

임 전 차장이 문건들을 ‘일기장’에 비유한 대목은 특히 눈에 띈다. 양승태 대법원은 국가정보원 직원이 쓴 메모장 파일인 지논과 시큐리티를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며 댓글 대선개입 혐의를 받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을 파기환송한 적이 있다. 해당 파일들은 직원이 국정원으로부터 업무지침인 이슈와 논지를 받아 일기를 쓰듯 매일 업데이트한 내용인데 대법원은 “단편적이고 조악하다”, “업무와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내용이 규칙 없이 나열돼 있어 신용성을 보장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법원행정처 문건의 가치를 떨어뜨려 증거에서 배제하려는 전략이다.

임 전 차장의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주장은 ‘이동식저장장치(USB)’에 있다.

“피고인(임 전 차장)은 중요 참고인 김민수·박상언(전 심의관)에게 차명폰으로 전화를 해 검찰 수사에서 최소한만 이야기해달라, 신중하게 진술해달라고 했습니다. 증거인멸 정황이 발견됐기 때문에 USB 원본을 반출하는 게 가능했습니다.”(검사)

“검찰이 얼마나 사실관계를 왜곡하냐면, 김민수·박상언의 수사기록을 보면 제가 저에 구애받지 말고 진술하라고 말했다고 나옵니다. 검찰은 제가 증거를 인멸하려 했다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겁니다.”(임 전 차장)

검찰은 수사를 하며 임 전 차장의 USB에서 무려 8635건의 법원행정처 문건을 확보했다. 그러나 검찰이 낸 증거라고 법원이 마음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독이 있는 나무는 열매에도 독이 있다는 ‘독수독과 이론’ 때문이다. 위법한 방법으로 수집된 증거라고 판명되면 그 증거는 사용할 수 없다. 임 전 차장은 이 이론을 근거로 대응하고 있다. 검찰이 법정에서 한 말을 종합하면, 임 전 차장은 지난해 5월 대법원 사법행정권 남용 특별조사단이 조사결과를 발표한 뒤 자신이 사용하던 외장하드를 폐기하고 업무일지도 없앴다고 수사 초반 진술했다. 그러나 검찰의 압수수색 중 USB에 자료가 빠져나간 흔적이 발견됐다. 검찰 추궁에 임 전 차장이 자신의 변호사 사무실 여직원 파우치에 있던 USB를 검찰에 제출했다. 검찰은 여기서 문건들을 확보했다.

임 전 차장은 사본이 아닌 원본을 검찰이 가져갔고, 혐의와 무관한 문건들이 상당수 포함됐으며 자신은 압수수색 영장 내용도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만약 임 전 차장 주장이 받아들여지면 8635건은 물론 이 문건을 토대로 한 참고인들의 진술까지 모두 배제될 수도 있다.

■ 재판개입 미수라 직권남용 무죄?

직권남용죄 성립을 둘러싼 공방 때 검찰과 임 전 차장은 악감정을 드러내며 다퉜다. 한국에 재판거래나 재판개입을 처벌하는 법은 없다. 검찰이 직권남용죄를 적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형법 제123조는 직권남용죄에 대해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때”로 규정한다. 의무가 아닌데도 심의관들에게 부적절한 문건을 작성하도록 시킨 게 범죄라고 검찰은 본 것이다.

“단순 위법한 지시를 한 경우에는 의무 없는 일을 시킨 게 아니라는 주장은 처음 봤는데, 지금 피고인이 그런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입니다.”(검사)

“제가 독단적인 법리를 창출했다고 하는데 검사님께서 행정법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당연히 공무원은 행정조직 일원으로서 직무상 명령에 복종할 의무가 있고, 다만 직무상 명령이 명백하게 위법한 경우에만 복종 의무가 없다고 행정법 교과서에 써있으니까 자세히 봐주시기 바랍니다.”(임 전 차장)

임 전 차장은 심의관 역할을 무력화해놓고도 자신의 지시가 ‘명백하게’ 위법하지 않아 괜찮다고 했다. 심의관들은 자신의 보조자일 뿐이어서 방해당할 권리나 의무가 있는 사람도 아니라고 했다. 명백하게 위법한 지시였다면 심의관들이 거부하지 않았겠느냐는 취지도 이 주장엔 담겼다. 검사는 “심의관은 10년차 이상의 법관들”이라며 “중견 법관으로서 법률전문가라는 점을 보면 심의관은 고유한 권한을 갖고 업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반박했다.

임 전 차장, 직권남용죄 공방 중엔

“위법 명백한 지시 아니면 괜찮아”

41년 전 관련 판결까지 꺼내가며

‘현실적 피해 없인 처벌 불가’ 주장


임 전 차장은 41년 전 판결도 꺼냈다. 1975년 충남 온양경찰서 정보과 순경이 신민당 충남 제2지구당 간부회의를 도청하려고 회의장에 무전기와 녹음기를 설치했다가 사전 적발된 사건이다. 순경은 주거침입과 직권남용죄로 기소됐다. 1978년 대법원은 직권남용죄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다. 도청이 실행되지 않았다는 게 이유다. 대법원은 “도청을 하려다 사전에 발각돼 현실적인 피해를 주지 않았다면 직권남용죄로는 처벌할 수 없다”고 했다. 임 전 차장은 이 판결과 함께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도 언급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황적준 박사에게 사인 조작을 요구한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이 직권남용죄로 기소됐다가 무죄를 선고받은 대법원 판결이다. 대법원은 “황 박사가 직책상 강 전 치안본부장의 지시를 받을 위치에 있지 않았다”고 했다.

직권남용으로 ‘국가기능의 공정한 행사’가 실제 침해됐는지를 따지고, ‘개인의 의사결정의 자유’까지 보호법익에 포함시킨 이들 판결을 거론하며 임 전 차장은 자신이 무죄라고 주장한다. 자신이 심의관들에게 재판거래와 재판개입 문건을 작성시켰을지언정 국가기능에 피해를 준 게 없고, 심의관들의 자유의사를 침해한 것도 아니라는 주장이다. 법리 싸움에 사활을 건 모습이다.

‘정의’보다 법리 싸움에 사활 걸고

법원은 얘기 들어줄 거란 자신감

‘실체적 진실 밝히기’ 긴 여정 예고


무엇이 양 전 대법원장과 임 전 차장을 당당하게 만들었을까. 한 법조인은 두 사람의 첫 재판 모습을 놓고 ‘자신감’이라고 평가했다. “검찰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법원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요? 쉽지 않을 겁니다. 사법농단의 진실을 밝히는 일은 이제 시작이죠.” 2017년 3월 사법농단 의혹이 처음 터진 후 법정에 오기까지 걸린 2년보다 앞으로의 재판에서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데 걸릴 시간이 더 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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